아빠라는 이름 아래_추위

예순 일곱번째 이야기

by 박상민

어린이집 등원 준비. 하나부터 열까지 쉽사리 되는 경우가 없다. 세수, 식사, 양치, 원아수첩 쓰기, 머리 묶기, 옷 입히기... 등등. 하늘이의 컨디션과 마음에 따라 천지차이인 등원 시간. 오늘은 아내와 함께 등원하는 하늘이를 배웅하며 함께 나왔다. 물론 양손에는 재활용 쓰레기가 가득하게 있다. 그런데 하늘이가 나의 옷을 보며 말했다. “추워. 아빠 옷 입고 나와야지.” 그렇다. 나와보니 발에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 날이 추워졌다.


집에 들어와 창밖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시 이익 시익익 거센소리를 낸다. 성난 황소처럼 불어 재낀다. 바람이 섞인 복잡한 추위에 사람들은 목련 꽃망울처럼 옷을 싸맨다. 저마다 일그러진 인상으로 총총 거리며 발걸음 서둘러 어디론가 가고 있다.


맹렬한 추위. 그 추위에 굴복하며 두 달간 새벽마다 걸어 다닌 적이 있다. 대학교 4학년. 추운 겨울 실습지를 지하철과 도보로 다녔다. 안양역에서 내려 기관까지 가려면 대략 1시간 족히 걸어야 한다. 마을버스는 2시간에 한 대씩 온다. 출퇴근 시간에는 자리가 없다.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안양역 롯데 백화점. 그곳의 온기 잠깐 머금고 당당하게 걷다 추위에 굴복할 때 즈음. 아무것도 없는 웅장한 안양천이 나온다. 시퍼런 겨울에 놓인 안양천의 기백 앞에 언제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온기에 취해 늘 생각한다. “오늘은 안양천을 걸을 때 이 생각을 하면서 빨리 걸어야지.” 그러나 안양천에 서서히 접근하게 되면 잡념은 없어진다. 오직 하나.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이 또한 지나가리라.” 건물들이 하나둘씩 없어지고, 양볼에 날카로운 커터칼 같은 바람이 사정없이 위협한다. 그때부터 두려움에 고개는 숙여지고, 걸음은 느려진다. 칼바람은 비발디 사계의 초입 부 바이올린 소리처럼 은밀하고 냉정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힘겹게 나아가면 가장 고통스러운 구간이 찾아온다.


“안양천 육교.”


안양천을 지날 때 가장 고통스러운 곳은 바로 육교. 칼바람은 어느새 힘을 더해, 허리와 어깨에 힘을 주지 않고선 버틸 수 없는 거대한 파도로 돌변한다. 한참을 버티다 보면 어디선가 바이올린의 울음소리 귓가에 가득하다. 비발디의 겨울 1악장. 사정없이 몸부림치게 만드는 바이올린의 울음소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바람은 내 이마를 스치고, 이후 양볼과 귀를 덮는다. 그리곤 사정없이 나를 휘갈긴다. 양보란 없다. 뼛속까지 사정없이 때리는 그 추위에 정신이 없다.


한걸음을 옮기기가 힘들다. 몸에서는 기운이 빠져나간다. 조금씩 열리는 입술에는 힘없는 뿌연 공기가 이리저리 맥없이 사라질 뿐이다. 주위에 사람이 없다. 차도 없다. 나도 없다. 단지 검은 육교와 공포의 추위뿐이다. 또 하나 오로지 광기 어린 바이올린 울음소리만 있을 뿐이다. 그런 추위에 나의 마음도 두들겨 맞는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고통 속에 걷고 있는가? 이 시간 추위라는 늪에 다리를 땅으로부터 뽑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꽉 쥐어 보지만 손가락의 찬 기운의 불쾌함이 전해진다. 덜덜 거리는 치아에 턱이 얼얼하다.


그렇게 한 시간씩을 걸어서 도착한다. 신기한 건 추위로 인해 경직되어 떨고 있는 온몸은 상당히 오랫동안 굳어 있다. 도착한 사무실에 종종 들리 전 비발디 사계의 겨울 1악장. 나는 아직도 그 연주를 들으면 어깨와 목이 굳어진다. 그러면서도 나는 종종 찾아 듣는다. 어쩌면 추위에 굴복당했던 그 시절을 향해 애증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비발디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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