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한 번째 이야기
굳음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 한 대학교의 슬로건. 그 문구를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경직된 세상의 굳어버림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부드러움이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단어가 아니더라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이 문장의 힘은 드러난다. 학업을 마치고 처음 들어갔던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입사원이라는 딱지가 내 온몸에 붙어 있던 첫 출근, 직장 동료들은 냉랭했고, 저마다 자신의 일에 바빴다. 더 이상 동료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던 직장터는 그야말로 사냥터였다. 시퍼런 눈으로 어디 잘하나 보자? 하며 눈을 치켜뜨는 팀장부터 ‘오늘의 사냥감을 얻지 못하면 내가 굶게 된다.’ 하며 무섭도록 일하는 모습에 나는 경직되어 갓고 굳어 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 나의 굳은 얼굴과 모습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내 삶에 찾아온 예상치 못한 부드러운 한마디는 온통 경직되어 굳어 버린 삶의 근육을 온전히 풀어주었다. 당시 옆자리에 근무하던 선배. 그가 웃으며 차 한잔 하자고 했다. 긴장을 늦추지 않은 굳은 표정으로 선배와 대면했다. 은은한 은빛 안경, 단정한 외모, 무엇보다 처음 봤을 때부터 편안하고 부드러운 인상 때문에 호감을 느꼈던 선배. 그러나 사냥터가 된이상 그 선배를 향한 나의 시선은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상민 씨. 참 성실한 거 같아.” 예상치 못한 부드러운 한마디. 거대한 빙하와 같이 굳은 얼굴에 얼굴에 미묘한 균열이 일어났다. 그리고 선배는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긴장되고, 어렵지. 그런데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조금만 긴장 풀면 상민 씨 잘할 거 같아. 너무 굳어있는 거 같아서 불렀어. 궁금한 거 있음 언제든지 물어보고 파이팅하자고!”
그렇게 말한 선배는 내 등에 손을 살짝 얹더니 먼저 들어갔다. 그 터치는 마치 얼음땡과 같았다. 그간 얼어 있던 내 모습에 “땡” 하고 온몸의 긴장이 서서히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그간 경직되어 있고, 굳은 인상으로 상대를 대하고 바라보니, 나 역시 그 시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관계가 깊어지거나 자연스러운 만남이 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육아에서도 이점은 너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늘이가 4살이 되면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펼치며 하늘이에게 고집이 생겼다. 그리고 그 고집은 짜증과 떼 부림으로 드러난다. 그때마다 하늘이의 얼굴은 굳어 있다.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음에 표출하는 하늘의 모습이다. 이 같은 하늘이의 굳어 있는 얼굴과 마음을 푸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헤아림이다. 하늘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가 원하는 욕구를 잘 파악하고, 그것을 들어주는 것. 그러면 하늘이의 마음은 한결 풀어져 있고, 굳어 있는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힘이 들고 어렵다. 또 하나의 방법은 매를 드는 것이다. 매를 들고 훈육을 하면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 방법은 굉장히 쉽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첫 번째, 마음을 헤아리는 방법은 하늘이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풀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두 번째, 매를 드는 방법은 하늘이가 기억하고, ‘아빠한테 혼났지. 아빠가 화났지. 아빠 무섭지.’ 하며 이후 반응을 보인다. 즉, 매를 사용하는 방법은 굳어 있는 그 아이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바꿀 수는 있어도, 아빠라는 존재의 이미지를 굳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하늘이에게 아빠라는 이미지가 굳어 있을 가봐 걱정된다. 그리고 나의 행동이 그 이미지를 더욱 굳게 만들까 봐 마음이 쓰인다. 하늘이와 오랜 시간 함께 하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하늘이를 보며 나도 “하늘이를 변화시키는 부드러운 힘”을 가진 아빠로 자라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