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영강을 걷는다.
나는 오늘도 수영강을 걸었다. 부산의 여름은 습하다. 적응할 만도 한데 아직도 눅눅함이 귀찮다. 기분 나쁘게 살짝 나는 쉰내 때문에 다시 빨아야 하는 수건이 싫다. 장속에 오랫동안 넣어 놓은 짙은 파란색의 어깨 위에 살짝 피어난 곰팡이도 맘에 들지 않는다. 이런 집안에 퍼져있는 습기를 피해 수영강으로 탈출한 사람이 많다. 가끔은 사람을 피하고 싶을 때는 밤 11시 반쯤 나가 뛰고 걷는다.
사람은 없고, 강물만 조용히 흘러간다. 집안에 있던 습기는 여전히 나와 함께 해서 일 년 중 가장 땀이 많이 나는 시기가 찾아온다. 그런데 드디어 비가 그쳤다. 2주간 습하고, 흐리고, 구름 끼고, 온 대기에 미스트가 가득 뿌려졌던 어제까지의 날씨가 사라졌다.
기지개를 켜듯 아침부터 햇살이 강렬하게 솟구치고 있다. 사방으로 뻗친 햇살이 반갑긴 한데 계속 가까이 두니 따갑다.
지난달 수영강을 걸으며 한동안 돌아다녔는데 얼굴이 다 타서 보는 사람마다 반응을 했다. 관심으로 반응한 거겠지만 보는 사람들 마다 그런 반응은 몹시 삶을 귀찮게 만든다. 내가 얼굴이 좀 탔든, 빨갛게 되었든 때로는 그냥 아무 말하지 않는 사람이 좋다.
그러다가 먼일 있었어? 무관심한 척 물어보는 사람이 더 센스 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이 귀찮아 나는 선크림을 발랐다. 그러나 알고 있다. 선크림 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모자를 찾았다. 워낙 모자를 안 쓰고 다니지만 오늘은 꼭 필요하다.
한참을 뒤지다 모자 하나를 찾았다. 밀짚모자였다. 울진에 갔을 때 마을을 돌며 밭일을 도와드리기 위해 돌아다닐 때 썼던 모자였다. 당시 우리들 사이에서 모자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아이템이었고, 이후 분명 필요할걸 예상했다. 그래서 버리지 않았고, 커다란 짐들 위해 사뿐하게 얹혀 있는 걸 발견했다. 반가웠고 그리웠다.
밀짚모자를 한참 바라봤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또다시 열심을 내어 준비하고 있을 상황인데,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살짝 무력함이 주변을 맴돌아 마음을 뺏아가고 있었다. 그 시절을 몹시 그리워 지난날 함께 했던 이들과의 사진과 영상을 돌려 봤다. 올해 또 가기로 했었는데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고, 서서히 잊혀져 가니 어깨가 툭 떨어졌다.
나는 그래서 수영강을 찾았다. 가는 동안 밀짚모자를 썼다. 이곳에서 밀짚모자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영강을 수차례 걸어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 최초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분이 좋다.
날이 따갑지만, 금세 숨어버린 습기 때문인지 콧속이 쾌적하다. 왔다 갔다 거리는 팔은 따가웠지만 얼굴에 빛을 가려주는 밀짚모자가 고마웠다. 한참을 걷다 반사경에 비친 내 모습이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밀짚모자 쓴 허수아비 아저씨 같다. 그러다 그 옛날 오즈의 마법사 1939년 영화판에서 나눈 허수아비는 도로시의 대화가 생각난다.
도로시 : 뇌가 없는데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허수아비 :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사람들도 생각 없이 말을 많이 하지 않니?
- 오즈의 마법사 1939년 영화판 -
생각 없이 살고, 생각 없이 말하게 만드는 시대. 너무 빠르고 바쁘게 살아야 할 것 같은 시대. 이런 상황 속에 밀짚모자를 통해 함께 한 수영강을 걷는 시간은 내게 추억을 되살아나게 만들었다. 또한 또 그 밀짚모자를 쓰고 걸으며 잠깐 이나마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만들어준 수영강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