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가 필요하다.

by 박상민


한 동안 안티 기독교인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비난하던 사건이 있다. 그 사건은 한 목사의 발언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성도가 내 성도가 됐는지 알아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옛날에 쓰던 방법 중 하나는 젊은 여 집사에게 ‘ 빤스 내려라, 한번 자고 싶다. ’ 해 보고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똥이다. 또 하나는 인감증명을 끊어오라 해서 끊어오면 내 성도요, 어디 쓰려는지 물어 보면 똥이다.” 과거 전광훈 목사의 발언이다. 이 사건은 그동안 맹렬하게 비난 하고자 했던 안티 기독교인들의 시발점이 되어 동영상과 수많은 기사들을 배포 시키며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기독교를 접해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건이었다.



비단 이사건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스스로의 삶에서 예수의 향기를 전하며 살지 못 하고 있다.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첫 사명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 즉, 나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이 비춰져야 하는 것을 잃어버린지는 오래다.


이에 걸맞게 한국 교회의 추락한 영향력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러한 분위기의 때문인지 한국교회는 1980년을 기점으로 하염없는 하향세를 띄고 있고 지금까지 그 분위기를 역전 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첫째 계명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 가운데 극단적으로 하나님 사랑에 초점을 맞춰 가르치고, 전하고, 실천하고 있다.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열정의 하나님 사랑은 결국 성도의 삶을 목회자와 교회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결국 목회자와 교회의 명령이라면 맹신에 가까운 복종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믿음 없는 사람으로 취급 받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또 하나의 하나님의 커다란 계명인 이웃사랑은 교회의 성장, 부흥, 개인구원 이라는 이름 아래 숨어져 보이지 않고 있다. 마치 경제 개념으로 착각이 날정도로 우리나라의 60년대 선 성장 후 분배주의를 보는듯 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어둠을 밝히는 빛의 성도들이 있다. 이들은 산위에 마을이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헌신과 사랑, 용서와 섬김이라는 아름답지만 강력한 무기로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성도들의 삶과 헌신이 있기에 기독교는 이천년간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성도 하나하나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될 때 성도의 모임인 교회가 세상에 엄청난 영향력을 전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런 가운데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균형이 있게 보여주는 한 바보의사의 이야기가 있다. 수많은 직책과 수식어 가운데 성도의 삶을 온전히 이루고 싶지만 매번 실패하여 실망하는 우리에게 바보의사의 모습은 한 사발의 시원한 냉수와도 같다. 이 바보의사는 때로 새벽에 몰래 병실에 있는 환자를 찾아가 기도하고 선물을 놓고 간다. 교회에 상처를 받고 이제는 아무도 돌보지 않은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며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날 신실하다고 불리는 많은 그리스도들의 문제점인 편협한 교제권도 이 바보 청년에게는 다른 세상이야기이다. 교회의 성도 뿐 아니라 병원의 간호사 들에게도, 식당의 조리사에게도, 구두를 닦는 아저씨에게도, 환자 한명 한명에게 까지 그에게는 교회의 형제자매와 같은 존재였다. 이처럼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는 이 바보의사의 삶을 다룬 「그 청년 바보의사」는 읽어내려 갈수록 책장에서 손을 떼어내기 힘든 흡입력을 갖고 있다. 이 흡입력은 일반인에게는 물론 하나님의 성도인 우리에게 진정한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안겨준다.



주인공 바보의사에 대한 이야기는 위인전에
나올듯한 외모나 훌룡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아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듯한 친근한 동네 형과 같은 푸근한 인상을 지닌 사람이다. 그가 우리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의사이며, 환자들에게는 따뜻했고, 동료들에게는 친절했으며, 환자를 기도하는 의사였던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 그는 의사경력은 짧았지만, 그의 정성이 환자들의 병든 몸과 상처입은 마음을 치유하여 예수님 앞으로 인도되는 사건들이 항상 일어났던 하나님을 비추는 하나님의 거울과 같은 의사였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상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난다. 언제나 상처 입은 치유자로 늘 이웃들 곁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비추며 함께 할 줄 알았던 그의 이웃들에게 청천병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져 온다. 그것은 그의 죽음 이었다. 고대부속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마치고 육군 28사단 의무관으로 복무 하던 중 사격훈련지원을 나간 그는 보통 군의관들과는 달리 앰뷸런스에서 나와 일반 병사들과 함께 어울리며 풀밭에서 밥을 먹고 담소를 나누다 유행성 출혈열을 걸리게 된다. 결국 그는 33세 너무나 젊은 나이에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게 된다. 한 군의관의 죽음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그에게 항상 도움을 받고, 위로를 받았던 환자들, 기념일 마다 가장 알맞은 선물을 가져다 주며 자신을 챙겨주던 동료 의사와 간호사들, 그리고 그를 보며 하나님을 느꼈던 교회의 형제, 자매들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안타까워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참 의사’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참 예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청년 바보의사」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년의사의 글과 그와의 추억을 생각하며 저술한 주위에 사람들의 글들로 이루어 지고 있다. 엮은이는 이렇게 책을 출판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해서라도 그의 자취를 우리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바보같이 주기만 하던 그를 기억하면서.’라고 말하며 책의 시작에 밝히고 있다.



주인공의 삶을 통한 글로 엮어진 이 책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을 닮으려 노력하고 예수의 흔적을 쫓아가려고 하는 그의 진지한 삶의 발걸음이 나타나 있다.



주인공은 책에서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손해 보는 일’을 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


‘네가 날 위해 시간과 마음을 포기한다면 내가 정말로 기쁘게 그 예배를 받겠다. 하지만 너는 그로 인해 성적이든, 이성교제든, 사람들과의 관계든 무엇에선가 분명히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래도 내게 그 부분을 주겠니?’

라는 음성을 듣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뚝심 있게 하나님 편에서는 결정을 내리다 보면, 점점 더 그렇게 결정하기가 쉬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 시기에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손해를 분명 보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한 결정 역시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한 결정 역시 후회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님의 방법으로 손해를 다루시며 역사하시는 손길을 분명히 보았다. 주님의 구속의 역사가 값을 치루고 이루신 것이었듯, 우리 헌신과 열정은 입술의 고백만이 아닌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면서 열매를 맺는다.’ 저자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는 것도 억울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손해에 대한 부분들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수많은 곳에서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하며 외치는 이 세상에서 저자는 하나님 앞에서의 교제가운데 손해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우리에게 물음표를 던지며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그것도 모자라 즐거움을 유보하는 연습과 일상생활에서 기꺼이 손해 볼 줄 아는 용기를 가져보라고 제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우리의 연약함을 겨우 받쳐주는 지지대 정도가 아닌 생명이고 능력이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일단 우선순위를 정하고 예수님께 시간을 드리기로 했으면 그것이 침식당하지 않도록 지켜야 하며,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 시간임을 그분 또한 아시기에 귀한 시간을 드릴 때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고 목에 힘을 주어 말하고 있다. 저자의 이런 주장은 그의 삶에서 행동으로 실천되는 모습을 통해 더욱 힘이 붙는다. 만만치 않은 의학 공부 기간에도 일반인을 위해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자 만든 ‘예흔’ 이라는 모임의 리더가 되어 팀원들을 한명한명 집까지 태워다 주는 섬김, 레지던트의 숨막히는 바쁨 속에서도 예배를 절대 빠지지 않기 위해 일주일에 몇 번씩 당직을 즐거움으로 삼는 하나님을 향한 우선순위, 경제적으로 어려운 신혼부부의 암에 걸린 아이를 위해 모자를 사주고, 케이크를 들고 집까지 찾아가는 이웃사랑의 실천 이런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손해에 대한 그의 주장을 한번 더 주의 깊게 생각하게 하는 내용들이다.



저자의 삶속에 더욱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교회의 문턱을 낮췄다는 것이다. 낮 12시에 힘겹게 한걸음씩 옮기며 아무도 없는 그 더운 우물가로 향하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보고 나무라지 않았다. 아무 관심도 없고 그저 입에 오르기도 민망한 그 여인에게, 지나가기만 해도 침을 뱉고, 손가락질을 하던 그 여인에게 예수님의 첫 한마디는 획기적이었다. “물 좀 주세요.” 만약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왜? 그렇게 사느냐?’ ‘천국과 지옥이 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이렇게 말을 했더라면 분명히 그 여인은 도망갔을 것이다. 그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지혜로운 예수는 그 여인에게 눈높이를 맞추시고 “물 좀 주실 수 있나요?”하고 여쭈어 본 것이다.


책을 통해 주인공이 행했던 많은 부분들 중에 내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준 부분은 바로 교회의 문턱을 낮춘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접촉점을 발견해서 상황화적 만남을 이루어가는 모습은 마치 예수와 사마리아여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는 클래식을 통해서 일반인들과 어울릴수 있는 접촉점을 찾는다. 또한 싸이월드와 블로그를 통해 써내려간 좋은 글들과 음악에 관한 감상평들은 많은 이에게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데 커다란 도구가 되었다. 심지어 그는 “안수현의 CCM여행” 이라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부분들은 신학생인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열정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열정으로 인해 오히려 많은 비기독교인들에게 상처를 안겨다 준다.


예전에 나는 수원역을 지나가는데 초계함 사건으로 인해 역 광장에서 추모식을 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데 굉장히 민망한 일이 일어났다. 항상 역 광장에서 큰 볼륨으로 노방찬양을 하던 사람들이 오늘 만이라도 같이 애도하고 슬픔을 함께 하겠지? 생각했던 나에게 그들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들은 국민의 슬픔이요, 국가의 아픔이었던 초계함 사건을 애도하는 상황 속에서도 노방찬양을 멈추지 않았다.


“나 기뻐하리, 나 기뻐하리, 나 주안에서 기뻐하리라.”

쉼 없이 확성기를 대고 찬양을 했다. 그 찬양을 듣는 나에게 그들의 찬양은 이미 찬양이라기 보단 발악 같이 들렸다. 그리고 씁쓸했다. 사람들은 인상을 구기며 지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차며 지나갔다. 그들에게 주위환경과 눈초리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사회적 분위기와 국가의 슬픔들 따위는 상관없어 보였다.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찬양의 목소리만 크게 외쳐 될 뿐 사회적 필요와 국민적 애도 따위는 영적으로 필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행위는 아직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생기지 않은 사람들에게 교회의 문턱을 더 높게 만들 뿐이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2000년 전 예수는 저들과 같은 사람이었구나? 하며 생각하게 만들 뿐이다. 더 이상 우리의 삶으로 인해 교회의 빛이 가려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악취가 나는 세상의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야 한다. 썩어져 가는 세상에 소금으로, 어두워져 가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이 우리에게 찾아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를 바라보며 삶의 지표를 찾고,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회복해 가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주인공은 그 역할을 훌룡하게 잘해 나가고 있다. 특히 기독교인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관계를 쌓은 다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좋다. 이런 모습은 그 청년이 바보 의사가 아닌 정말 지혜로운 의사였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런 훌룡한 모습을 더욱 부각 시켜주는 것은 주인공의 대화 속에서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수현(주인공) 선배는 다윗 같아요.” 차를 같이 타고 가던 후배가 수현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냐, 난 유다 같은 사람이야.” 후배가 당황하며 수현을 쳐다봤다. 그는 평소처럼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아니라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를 말하는 거야.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렸던 형이지. 그는 며느리 다말에게서 아이까지 낳는 패륜을 저지른 사람이야. 그의 인간성은 죄악덩어리지만 단지 예수님의 계보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점점 더 주님을 닮아 갔거든 나도 그렇게 되길 바래.” 이 부분에서 그의 모습은 더욱 우리에게 있어서 겸손이야 말로 하나님이 주신 빛의 에너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 청년 바보의사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약간은 아쉬운 부분을 안겨다 주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주인공을 미화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사실 주인공은 현재 이세상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들을 엮은 것들과 그의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글을 써내려간 저자는 그의 모든 삶이 일 점일획도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치 그의 모습을 보면 구약의 요셉과 같지 않은가? 싶을 정도로 주인공의 모습 속 에는 단 한사건도 주인공의 인간적 나약함을 볼수 있는 부분이 없다. 물론 어떠한 전기문이든 간에 한 사람의 위대한 부분을 초점으로 삼아 그 책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전기문에도 때로 인간의 나약한 부분이라든가, 단점의 모습들을 드러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균형 있는 시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그 청년 바보의사의 저자는 그러한 부분에서 단 한 차례도 저자의 연약함이라든지, 단점에 대한 부분은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주인공이 행했던 아름다운 일들을 더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 아름다움들과 훌룡함의 지나침이 때로 읽는 자로 하여금 약간의 거부감과 나는 전혀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단지 주인공의 일화를 읽으며 박수 치면서 훌룡하다고 칭찬하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에 뿌리박혀 있는 “손양원 콤플렉스”와 비슷하다. 손양원 목사가 자기 자식을 죽인 그 원수를 양자 삼아 사랑하신 위대한 원수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러나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손양원 목사의 원수사랑에 대해 그저 은혜만 받고 박수만 칠 뿐이다. 그를 닮으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원수 사랑이라는 부분은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처럼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점에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며 아쉬움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랑 비슷하다고, 가까운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는 저자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수많은 아름다운 일들로 인한 주인공의 영웅적 묘사는 우리에게 실천 보다는 부담감을 안겨주며, 닮으려는 의지 보다는 그저 박수치며 날려 보내게 만든다. 만약 지금은 천국에 간 주인공이 살아있을 때 이 책을 출판한다 하면 그는 기뻐했을까? 그는 이렇게 엮어져서 나오는 것을 바랬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끝까지 묘한 끌림을 가져다 준다. 마치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 임재연습」처럼 몇 번이고 다시 책을 들추게 만든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할 수 없는 어려운 부분들을 너무도 쉽게 해나가는 우직함에 반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어느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 했던 로렌스형제의 말이 생각났다.

“만약 나에게 한 번의 설교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하나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설교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더 설교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전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설교 할 것입니다.”


이와 너무 흡사하게 주인공 바보의사는 한 사람 한 사람과 교제할 때 하나님의 그 임재나 나타났다고 책의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끌림은 그가 바로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이 에게 예수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에 있다. 믿는 자 들 에게는 다시 한 번 예수 닮기의 목표를 안겨주며 우리의 삶의 방향에 대해서 일깨워 주고 있다. 믿음이 없는 자 들 에게는 신선한 충격과 새로운 길을 인도한다. 그것은 세상 어느 진리의 길이 아닌 바로 예수의 길이다. 그 길은 세상은 미련하고 어리석다 생각하나 참 진리의 길이요, 어둠을 밝히는 빛의 길인 것이다.


세상은 점점 어두워 지고, 곳곳의 악취는 더욱 심해진다. 거칠고 음란하고 얄팍한 문화는 마치 우리를 이끄는 유일한 즐거움의 길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기독교문화는 생명력이 있어서 그것들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교회야 말로 세상의 어두워 지는 곳의 빛 인것이다. 성도야 말로 썩어져 가는 이 시대를 정화시키는 소금인 것이다. 때때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일요일날 마저 쉬지 않고 하루종일 교회 가는 것을 어리석게 여길 것이다. 조금 반칙해서 지름길로 가면 금방 갈수 있는 길을 정도를 따라 손해 보며 걸어가는 우리를 향해 바보 같다고 말할 것이다.


마치 그 청년 바보의사에게 말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청년 바보의사가 하늘나라에서 그런 우리를 응원할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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