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우리 가족은 갑작스레 여행을 떠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차편을 못 잡아서 동동거리기도 했고, 예정과 다른 시간에 기다림에 급히 숙소를 구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의 분위기가 그렇기도 했지만, 부모님에게는 예약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부딪히는 어려움들에 내 마음은 불편해지기 일쑤였지만, 아빠는 “이런 게 즐거움이잖아.”하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대학 때 내 전공은 화학이다. 새내기 시절부터 실험은 내 생활의 일부였다. 실험실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안전수칙을 지키는 것이다. 그다음은 실험과정을 잘 숙지하여 순서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십여 년 이상의 학교 생활을 하면서 이론을 익히고 계획을 짜서 행하는 것은 자연스레 몸에 배어있다. 학생일 때는 지도교수님이나 조교선생님의 잔소리처럼 여긴 적도 있다. 하지만, 실험실을 관리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더더욱 당연한 일이 되었다. 자칫 대충 넘어간 실수가 큰 사고로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행사를 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일에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고, 꼼꼼한 계획을 하고 세세하게 체크하는 것이 행사를 제대로 치러내는데 필수이다.
대학 생활 내내 영화와 연극, 뮤지컬 등을 보러 다니길 좋아했다. 당시에 영화는 예매시스템이 구현되지 않은 곳이 많아서 현장구매를 하고 영화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국제영화제가 시작되면서 영화도 예매시스템이 생기기 시작했고, 연극이나 뮤지컬의 경우에는 반드시 미리 예약을 했다. 근처 식당에서 무엇을 먹을지, 동선은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정하는 것이 당연하고도 편안했다. 게다가 예약을 하면 좌석도 미리 지정할 수 있어서 줄을 길게 서거나 자리가 없어 좋지 않은 자리에 배정될까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계획을 세워두면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일정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친구와 약속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약속이라는 것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라 보아도 무방한 것 아닌가. 전공자의 특성일 수도 있지만, 어릴 적의 기억에 대한 반대급부일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이런 나에 대해 부모님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가며 사회 전반적으로 예약문화가 확산되었다. 예전에는 예약하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시던 부모님도 어느샌가 당신들이 직접 예약을 하거나 요청하게 되었다. 미리 세운 계획대로 진행될 때의 편안함과 뿌듯함을 느끼게 되신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아이는 예고치 않고 아프기도 하고,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기도 했다. 계획해 둔 일정대로 진행하다가도 방향을 바꾸거나 완전히 취소를 해야 하는 상황도 종종 생겼다. 이에 대비해서 내가 택한 것은 플랜을 여러 개 짜두는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세밀하고도 빠듯한 계획보다는 느슨하게 대략을 틀만 잡고,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사실 머릿속은 다양한 상황에 대해 생각해야 하니 복잡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대처할 수 있어서 마음은 편해졌다.
여전히 업무적인 일에 있어서는 계획을 세우고 진행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조금 마음의 고삐를 풀고 지내는 것도 꽤 괜찮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여행 갈 때도 전날 밤이나 당일 아침에 중요한 것만 대충 챙기는 경우가 생겼다. 처음에는 빠뜨린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낼 수 있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느새 해외 일정마저도 적용되어 대충 준비를 하곤 한다. 물론 공연이나 전시회 같은 것은 여전히 예약을 한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면 좋겠지만, 인생은 꼭 그 방향대로만 가는 건 아니더라. 커다란 틀과 중요한 포인트만 잡아놓으면, 조금 더 마음 편하게 기쁨을 느끼며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