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by 물빛

그날 이후 방에 있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전화를 받은 것이 자려고 누워있던 시점이라 방안에 있는 게 더 숨 막혔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익숙한 공간인데 공기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졌다. 집안 곳곳에 함께해 온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세탁실에 있다 슬며시 문을 닫았다. 울음이 턱에 컥컥 차고 올랐다. 몸을 돌리기에도 힘든 좁은 그곳만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지우고 싶었다. 흔적들이 남아있는 채로는 숨을 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불면의 날이 지속되고, 사무실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다 눈을 뜨면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생각과 마음이 정지된 채로 몇 달을 보냈다. 잠시 먼 곳에서 지내다 오기도 했지만, 방 안의 흔적들은 그대로였다.


코로나로 외출을 삼가야 하던 때였다. 아무리 애써봐도 몇년이 흘러도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기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 페인트 가게에 가서 예쁜 색 페인트를 고르고, 곱게 칠하는 법을 배웠다. 마스킹테이프를 붙이고 비닐로 보양작업도 꼼꼼하게 했다. 벽지 위에 프라이머를 바르고 완전히 말린 후 한번 더 발랐다. 아이들은 신나서 놀이 삼아 페인트칠을 했다. 방마다 다른 색을 칠하고, 온 집안의 재정비를 시도했다. 아이들의 침실과 공부방을 분리하고, 안방에서 아이들이 있던 공간에 내 책상을 들였다. 오랜 친구에게 화사한 해바라기 꽃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해서 침대 머리맡에 걸었다. 그 흔적들을 지워가는 시간들이, 그 흔적들이 지워지는 공간들이 아릿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복효근 시인의 ‘상처에 대하여’ 라는 시의 마지막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어릴 때부터 왠지 모르게 각인되어 있는 구절이다. 어쩌면 힘들 때마다 되새기라고 그랬던 걸까.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몸이 다치면 상처가 나고 시간이 걸려 나으면서 흉터가 남는다. 거의 안보일만큼 말끔히 나을 수도 있지만, 피부사이에 힐끗 보이는 새로 돋은 새살. 그 흔적은 그 상처와 그 사건을 떠올리는 매개체가 된다. 공기 중에 남은 흔적은, 생활 안에 묻어나는 흔적은 모른 척하기가 참 어렵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도 하나씩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걸음씩 지워본다. 다시 살아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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