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 갈 일이 있어 저녁도 먹을 겸 작은 아이와 함께 나섰다. "엄마 졸려요."를 연신 시전 하던 녀석이 도파민 전구체를 발견한 것이었다.
아이는 타코야키를 무척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기운이 없고 열나고 아프다가도 타코야키만 먹으면 벌떡 일어나던 아이다. 식품 매장을 걷다가 갑자기 환호성을 질렀다. "엄마, 타코야키 매장이 생겼네요." "어디 어디? 엄마는 안 보이는데?" "저기 아카초우 친(빨간 종이 등)에 타코야키라고 적혀 있잖아요." 날씨가 추워서인지 작은 매장 하나하나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은 꽤 멀리 있었다. 이 와중에 새로 생긴 타코야키 팝업숍을 발견하다니. 자연스레 줄을 서 있던 중에 갑자기 "엄마, 정신이 번쩍 들어요." 하며 아이는 보조개를 띠며 눈을 반짝거렸다.
식전에 타코야키를 한 상자 먹고, 식후에 두 상자를 또 사서 차에 올랐다. 차에 앉아 오물거리며 한 상자를 금세 뚝딱 먹어치우더니 과식했단다. 모처럼 고양이가 있는 카페에 가기로 한 참인데, 아이는 순식간에 스륵 잠이 들었다. 하아. 이 녀석 대체 뭘까. 낮에 커피를 마셔서 허브티 두 잔을 주문했는데, 사장님께서 단골이라고 군고구마도 함께 주셨다. 노란 속이 정말 달큰하고 촉촉해서 맛있는데, 아이는 더 이상은 못 먹는다고 사래질을 했다.
작은 아이의 소울푸드는 타코야키인데, 내 소울푸드는 뭐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니 김치국밥이 떠올랐다. 김치국밥은 한동안 내 소울푸드였다.
어린 시절 많은 가정에서 그랬었듯이 우리 집에서도 찬이 마땅치 않으면 김치를 볶아먹고, 찌개나 국을 끓여 먹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 밖에서 음식을 사 먹는 일이 일상이 되면서 김치요리나 된장요리는 굳이 사 먹고 싶지 않았다. 늘 집에서 먹던 것이고, 언제든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사실 질릴 만큼 자주 먹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학원에 진학할 때 우리 랩에는 두 명이 지원을 했다. 나는 학부 3학년 때부터 지내던 랩이었고, 타 대학에서 온 두 살 많은 언니가 동기가 되었다. 개학은 3월부터인데, 교수님은 우리에게 1월부터 랩에 나오라고 하셨다. 사실 내게는 일상이어서 이전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문제는 우리 랩에서는 생리활성실험을 해야 하는데, 과 특성상 생리실험을 하기에 적합한 실험실 환경이 아니었다. 그래서 1월 중순부터는 의대 약리학실에 가서 실험을 하게 되었다. 처음 갔던 날. 약리학 교수님은 직접 랫을 잡아 마취하는 것부터 하나하나 실험법을 시연해 주시며 자세히 알려주셨다. 교수님께 직접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랩에서 갔기에 얻을 수 있는 특혜였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랩과는 달리 아침 7:30까지 출근이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지내며 처음 다루는 생물과 기구들. 모든 것이 정신없이 돌아가서 목이 마른 지 배가 고픈지도 모르고 하루를 보냈다. 실험을 마친 랫을 정리해서 냉동고에 넣고 나니, 모든 에너지가 탈탈 털린 기분이었다.
이쪽 랩은 학교와 정반대 방향이라 가본 적도 별로 없어서,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도 잘 몰랐다. 언니도 이 동네는 처음인지라 일단 우린 각자의 집으로 헤어질 수 있는 서면으로 갔다. 우리는 다른 버스를 타야 했는데, 추운 겨울 저녁을 걷던 언니가 제안했다. "김치국밥 먹을래?" 그렇게 국밥이란 걸 밖에서 처음으로 사 먹어 보았다. 뚝배기에서 넘쳐날 듯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김치국밥에는 콩나물이 조금 섞여 있고, 약간 덜 익은 듯한 계란도 들어 있었다. 언니는 곁들여 나온 김을 부셔서 국에 넣으라고 했다. 안 넣어도 되겠지만, 일단은 처음이니 언니를 따라 해 보았다. 뜨거운 것을 잘 못 먹는 내가 후후 불어가며 한 숟갈 입에 넣자 모든 긴장이 다 풀리며 꽁꽁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사륵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별것 아닌 것 같은 국밥집에 왜 이리 줄을 서나 했는데, 줄 선 이들의 마음이 바로 이해되는 맛이었다. 언니랑도 왠지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종종 마음이 춥고 힘들거나 아플 때면 찾아가서 먹곤 했었다. 그 식당이 아직도 있으려나. 나중에는 콩나물국밥, 돼지국밥 등으로 종목 확장도 하게 되었다.
부산은 좀체 기온이 영하로는 잘 안 내려가는데, 한낮인데도 바깥 기온이 영하를 기록하고 집안에서도 바람소리가 들릴 정도로 골바람이 거센 날이 연속이다. 모처럼 뜨끈한 김치국밥을 끓여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