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사실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온다. 사람들에게 들킬세라 식물에게 먼저 살그머니 다가간다. 겨우내 앙상하던 가지를 서서히 초록으로 물들이고, 꽃이 먼저 피는 아이들은 분홍빛으로 온몸을 감싼다. 사람들은 여전히 찬 바람에 외투를 여미고 종종거리고 다니느라 이 은밀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차가운 공기에 살짝 섞인 온기를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깨닫는다. 봄이 이미 성큼, 곁에 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3월은 시작이라는 공식과도 같다. 12년의 학교생활이 몸에 새겨진 탓일까. 신년계획이 작심삼일로 지나고, 설날마저 지나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학교처럼 3월이 되어야 인사이동이 이루어지는 직장도 부지기수다. 그러니 우리는 자연스레 착각한다. 또다시 시작하면 될 것 같은 명분이 주어진 것이다. 이미 두 달이나 흘려보내버린 걸 까마득하게 잊고, 우리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무언가를 시작해 보려고 갖은 머리를 쥐어짜 본다. 마지막 기회란 것을 아는 것이다. 정말 새로운 해가 시작된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하고서, 우리는 봄이라는 핑계를 그럴듯하게 대본다.
봄을 느끼기 시작하면 온 일상이 어수선하고 바지런해진다. 두터운 옷들을 정리해서 넣고, 가볍고 어여쁜 색들의 옷을 꺼낸다. 아직 쌀쌀한 기온인 건 이미 확인했다. 그래도 햇살이 좀 더 따뜻해졌으니 괜찮다. 지긋지긋한 검정 롱패딩을 입는 건 일종의 자존심 문제다. 계절도 모르는 고루한 사람이 될 순 없다. 겨우내 신던 못생긴 어글리 부츠도 내던지고 가벼운 구두로 갈아 신는다. 산뜻한 차림을 하니 몸도 마음도 가볍다.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에 콧노래도 부르며 집을 나선다. 그리고 이내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니, 봄이라며? 대체 왜 이렇게 추운 건데!"
봄맞이 이동으로 정신없는 사무실에서는 대청소가 한창이다. 이른 아침부터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먼지를 탈탈 털어낸다. 사방으로 날리는 먼지를 뒤집어쓰며 바닥청소를 하고 책상 정리를 하고 나면, 개운한 느낌이 든다. 업무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왠지 큰일을 한 것 같고 문제없이 신나는 하루를 보내게 될 것만 같다. 이제 정말 열심히 일을 해볼까 다짐하며 책상에 의자를 바짝 당겨 앉는다. 묘한 의문이 하나 고개를 든다. 점심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왜 벌써 배가 고픈 걸까.
오후가 되자 으슬으슬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오른다. 코끝도 간질간질한 게 낌새가 좋지 않다. 다이어리에 마구 적어 넣었던 새로운 시작의 다짐들이 체한 듯 명치를 누른다. 늦게 시작했다는 조급한 마음과 이번만은 꼭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뒤섞인다. 뭔가 신나는 날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바로 집으로 가서 쉬고 싶은 생각만 간절해진다. 마음의 온도도 체온과 함께 가파르게 오르는 것 같다.
가벼운 구두와 산뜻한 옷차림이 준 기분은 찰나였다. 봄바람인가 했던 칼날 같은 한기, 개운하려던 바지런함, 배고픔에 마구 밀어 넣은 음식들까지. 그것은 열병을 앓기 직전의 전조증상이었다. 그렇게 봄은, 우리에게 다정한 인사를 전하는 듯 살랑이는 얼굴로 다가와 지독한 몸살을 안겨준다. 쉴 새 없이 휴지로 코를 풀어대고, 가파르게 오르던 열은 내릴 줄 모른다. 평소에 비타민이라도 좀 챙겨 먹을 걸 그랬나 싶다. 낮의 이른 허기는 맛난 무언가를 채워 넣는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욱신거리는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먼저 알아채기 시작했다.
봄은 늘 그런 식이다. 우리에게 달큰한 꽃향기를 먼저 흩뿌려 마음을 헤집어 놓고서는, 이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뜨거운 고열을 선물한다.
"봄인데, 대체 왜 이렇게 추운 건데."
낮에 내뱉었던 그 가벼운 불평은 밤이 되자 무거운 신음으로 변한다. 자존심을 세우며 벗어던졌던 롱패딩의 빈자리를 파고든 것은 다정한 봄바람이 아니라, 뼈마디를 시리게 하는 꽃샘추위다. 3월의 시작이라는 공식에 맞춰 억지로 끌어올린 의욕이 과부하를 일으킨 걸까. 일부러 열어젖힌 창문 사이로 들어온 건 개운한 공기만이 아니었나 보다.
결국 우리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서야 깨닫는다. 식물이 딱딱한 지표면을 뚫고 나올 때 이런 통증을 느끼는 걸까. 우리가 봄이라는 핑계를 대며 기어코 새로이 시작하려는 것들에는 우리가 외면했던 겨울의 잔재들이 열병이 되어 온몸을 휘감는다. 봄은 희망의 계절이기 전에, 지독한 성장통을 앓아야만 건너갈 수 있는 열병의 계절이다. 이 지독한 몸살을 앓고 나면 세상의 명도와 채도는 한 층 더 높아져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매년 봄을 환영하는 대신, 앓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