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이라는 노래가 있다. 대학 신입생일 때 나온 이 노래는 꽤 히트를 쳤었다.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가수의 노래이기도 해서, 노래방에서도 즐겨 부르곤 했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 지금은 헤어지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라는 노랫말처럼 멜로디도 모던하지만 구슬픈 곡이다. 심지어 앨범 제목도 ‘Darkness’이다. 가수도 이십 대라 젊고 풋풋한 때였는데, 갓 스물 된 아이들이 세상 슬픔 다 짊어진 듯 애절하게 노래를 부르던 장면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귀엽고 한편으로는 애달프다.
‘청춘’이라는 말은 얼마나 파릇파릇 예쁜 말인가. 좀 올드하고 식상한 느낌이 들면서도 순수한 동화 같은 봄날의 수채화 한 폭이 그려지는 낱말이다. ‘소나기’ 같은 소설이나 ‘클래식’ 같은 영화 같은 데서 그려지는 싱그러움 같은 것 말이다. 클리셰 범벅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지나온 시간 동안 청춘은 그런 거라고 주입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이미지만큼은 푸르르고 생기넘친다.
사전적 의미로 청춘은 ‘한창 건강한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봄철에 이르는 말‘이다. 푸름이 갖는 어여쁨 외에도 새싹이 움터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팔청춘이라 하며 십 대나 이십 대를 주로 청춘이라 이른다. 역설적이게도 그 시절에는 그 아름다움을 잘 모르고 지났던 것 같다.
십 대에는 입시의 문 앞에서 진학의 문제로 고뇌하고 이십 대에는 진로와 취업의 문제로 좌절하고 고민하는 게 일반적인 수순 아니던가. 흐르는 이 시절의 아름다움을 깨닫기에는 코 앞의 일이 더더욱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 큰 일 사이사이 가정사가 촘촘히 끼어들면 더욱 답답해지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틈바구니에서 연애를 한다거나 우정을 나누는 일로 숨통을 틔고 소소하게 행복을 맛보곤 하지.
예술은 철저히 무쓸모할 때 그 가치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쓸모가 끼어드는 순간 실생활이 파고들게 된다. 작가는 관객이 오롯이 완성된 작품의 그 아름다움만을 느끼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물론 작품을 제작할 때는 열성과 고뇌와 성실함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과정 없는 결과물이란 없는 법이니까. 보잘것없는 나라도 중년이 된 지금 우뚝 서 있는 현재의 모습은 좀 괜찮아 보이고 싶은 마음과 같은 것 아닐까.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촘촘히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온 내 뒷모습은 좀 감추어두고 싶은 마음 같은 것.
한창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예쁘다. 이모저모 힘들다고 재잘거리는 것조차 예쁘다. 그 또래여서 가질 수 있는 생각과 그 시절이어서 할 수 있는 행동들을 보여주는 것이 더없이 싱그럽고 아름다워 보인다. 한 발 물러서서 볼 때 예술품의 진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청춘도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