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by 물빛

나에겐 애인이 있다. 자칭 애인인 그녀는 작고 발랄하며 애교가 많다.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겨울날이었다. 과제로 너무나 바쁘던 때라 야근을 하고 집에 왔는데, 집 앞에는 스티로폼 상자가 배송되어 있었다. 생굴이었다. 다 정리한 후에야 가늠해 보니 대략 10킬로는 될 법했다. 굴을 보낸 이는 그녀의 부모님이셨고, 남편은 그녀의 주요 클라이언트였다. 놀라운 것은 같은 양의 굴이 서울의 남편 집에도 배송되었다. 명절이면 갖은 수산물이나 고기가 양쪽 집으로 왔다. 정말 감사하지만 의아했다.


겨울에 부산에 여행 온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 우리 단골집에 갔는데, 친구들과 여행을 온 참이었다. 남편에게 깍듯하고 내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그 후로 그 예쁜 사람이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도 되냐며 연락이 왔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고, 궁금한 것도 있어서 업무차 부산에 온다기에 만났다. 둘이서 보는 것이 처음인데 마치 오래된 인연인 듯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보다도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아주 즐거웠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녀는 아끼는 동생을 데려와 소개해 주었다. 아이들과도 함께 한 시간이라 브런치를 먹고, 근사한 카페에도 갔다. 그리고는 준비한 커플링을 꺼내 보여주며 우린 애인 사이라며 공표했다. 귀엽고 웃기고 신나는 이벤트였다.


그제야 제대로 물어볼 수 있었다. 대체 어떤 마음으로 클라이언트도 아닌 나를 챙겨주고 연락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했었다. 남편과 일을 해오면서 곰곰이 고민을 했단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녀가 내린 결론은 남편이 일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다른 모든 일상을 감당해 주는 이가 있고, 그게 바로 나라는 것이었단다. 나는 순간 먹먹해져서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업무상이지만 남편을 귀하게 여겨주는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그 이면을 생각하고 봐주고 감사를 표해야겠다고 다짐했다는 그녀. 지금껏 그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동이 밀려왔다. 한동안 무가치하게 여겨졌던 내 삼사십 대가 온전히 인정받고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특별하고 소중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는데, 감사한 마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가끔 보고 싶다며 연락이 온다. 그녀가 부산에 오거나, 내가 서울에 갈 때면 바쁜 틈을 내어 잠시라도 얼굴을 보려고 한다. 소개받았던 그 동생도 늘 함께다. 어느샌가 남편의 호칭이 형부로 바뀌었다. 귀한 인연은 잘 이어가야지.


지스타 기간이라 다시 부산을 방문했다. 언니랑 데이트할 거라며 오늘 하루를 비워 두었다. 함께 점심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예쁜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회사 이야기도 개인적인 이야기도 진솔하게 나누어 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훅 사라져 있다. 작은 아이가 올 시간이라 서둘러 돌아와서는 저녁도 함께 먹었다. 큰 아이 전화가 와서 아직도 바깥이냐고 놀란다. 이 녀석들 하루 종일 데이트 하는 날이라니까...

헤어지고 돌아오는데 톡이 온다. "언니 다음에는 OO이랑 홍콩에 같이 가요. 내가 안내해 줄게요." 사실 말만으로도 정말 고맙다. "그때쯤은 둘째도 대학생이겠죠." 했더니, 그래서 그 시기로 잡은 거란다. 센스와 배려까지 갖추었다. 내 애인은 너무 멋지다.


휘청이는 일상 속에서도 반짝반짝한 그녀와 서로 위로가 되고 지지가 되기를 바란다.

월, 화, 수,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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