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by 물빛

나에게 사랑은 공기 같은 것이었다. 엄청나게 설레고 콩닥콩닥 가슴 뛰며 보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은, 그런 감정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연인이 되기 전의 그런 설렘이나 두근거림으로 내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어느 순간 그가 내 삶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비로소 나는 이게 사랑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 때 사랑은 영원하다고 믿었다. 물론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과학적으로도 어떤 이와 사랑애 빠졌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않은가.


어느덧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공기 같은 안락함마저도 무미건조해지는 때가 오더라. 더 이상 내 편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때, 더 이상 그가 포함되지 않는 생활이 그려질 때가 오더라. 마지막 남은 신뢰가 바닥을 드러내고,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 한편에 불씨를 붙잡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그룹에서 솔직한 말들을 할 때였는데, 어떤 경우에도 그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모든 감정을 다 털었다고 여겼을 때인데, 왜인지 그를 이해하려고, 정당화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다. 물론 미련한 마음이긴 했다.


마음은 이동한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연인에게로, 연인에게 받은 사랑은 자녀에게로 이동한다. 물론 다른 연인이 생길 수도 있지만, 나에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내게 연인은 하나였고, 그 관계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 사랑은 내게 사치품 같은 존재가 되었다. 마음이 무너지고 몸이 망가졌는데 대체 사랑이 뭐람. 이런 마음을 한참이나 부여잡고 있었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지독한 외로움이지.


그런데, 한참을 생각해 보니 나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수많은 사랑하는 관계에서 내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내 삶인데 나를 스스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있는 나 자신. '다시는 그 누구도 사랑하고 싶지 않아' 라고 외치기 전에 나 자신을 돌보고 사랑해야 했다. 어느샌가 세상에서 무의미해진 듯한 나에게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올곧게 서야 내 아이도 보이고, 내 부모도 보이고, 생채기난 내 연인도 보이는 것이지.


나를 일으켜 세우는 일은 쉽지는 않았다. 매일매일을 살아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삶에서, 나 자신만을 위한 일을 하나씩 하기로 했다. 가족을 두고 혼자 휴식을 갖는다거나 좋아하던 이를 만난다거나 내 마음이 기쁠만한 일들을 찾아서 하는 거지. 웃음을 잃었던 생활에 기쁨이 하나씩 채워지면서, 활짝 웃는 날도 생기기 시작했다. 웃기 시작하자 나를 좋아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내 삶 속에 스며드는 이들이 생겼다. 서로의 삶을 가만히 지켜보고 잘되기를 바라며 응원해 주는 관계. 사랑함에 있어 꼭 연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 사람관계란 어떤 형태로든 양방향으로 소통이 가능해야 지속되는 거니까. 이렇게 내 삶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랑해" 라고 가만히 말해본다. 사랑이라는 말로써 지난한 상처가 모두 치유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려 애쓰다 보니 상처가 딱지가 된 것도 보이고, 어느새 아물어 흉터가 남은 것도 보인다. 그것을 보며 담담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 사랑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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