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적화가 필요해
5월 화창한 봄날. 어린이날 연휴를 맞아 구례로 떠났다. 함께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기로 했다. 성삼재까지는 차로 올라가서 주차를 하고 걸으면 된다고 들었다. 사두기만 하고 고이 넣어둔 내 등산화도 꺼냈다. 작은 아이는 캠핑 느낌을 내고 싶다며 텐트도 챙겼다. 작은 아이는 모처럼 텐트를 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 했다. 숙박은 우리의 아지트인 라라 님 댁이다. 이번에는 2박 3일이니 좀 여유롭게 라라 님과 대화를 할 수 있겠구나.
3월부터 큰아이는 일어학원과 미술학원으로 가득 채워진 생활을 해왔고, 작은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큰아이는 아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시간을 쪼개어 쓰고 있었다. 일본어학원 마치고 30분 후부터 진행하는 미술학원에서 밤까지 지내고 집에 돌아오면, 일본어 숙제를 하고, 헤드폰을 끼고 기타 연습을 했다. 매일 해야 실력이 는다면서 평일에는 한두 시간, 주말에는 서너 시간씩 몰두했다. 스스로가 정한 목표를 향해 가는 일은 옆에서 보기에는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본인은 당위성이 있어서 그 자체는 문제없이 잘해나가고 있었다.
아이가 다니던 일본어학원의 레벨은 네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는 레벨테스트 없이 가장 낮은 D반에서 시작했다.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니, 매일 숙제를 열심히 하고, 한자도 많이 외워야 하니 꼬박꼬박 써가면서 외우는 모습이 기특했다. 학원에서는 매달 셋째 주에 모의고사를 치른다. 결과가 나오자마자 B반이 되었다. 열심히 하더니 실력이 느는구나 싶었다. 일반적으로 반이 승급되면 실력이 향상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아이는 본인을 잘 알았다. 아이가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이 3월부터라 같은 점수대에 비해서 어휘나 문법적으로는 보완해야 할 점이 많았다. C, D반은 기초실력 향상이 목적이므로, 매일 어휘공부를 한다. 학원에서 준비한 어휘교재를 외고 매번 테스트를 받는 것이 일과였다. B반에서는 어학시험 성적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라 어휘수업이 없고, 독해수업이 많이 배정되었다. 아이는 B반에서 이틀 수업을 해보더니 선생님과 상담을 해서 C반으로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선생님들은 흔쾌히 요청을 들어주셨다.
일본어유학시험(EJU)에서 일본어 과목은 독해(400점)/청해/청독해(200점)/기술(50점)의 네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는 일본밴드를 좋아하고,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다 보니 생각보다 듣기 실력이 상당히 좋았다. 청해 점수는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대신 어휘와 문법이 부족하니 독해나 청독해 성적은 낮았다. 일반학과에 지망하려면 총점 280점 이상이 되어야 안정권으로 보는데, 예술영역은 220점 이상이면 큰 무리 없다고 했다. 아이는 6월에 시험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250점을 목표로 했다.
문제는 4월 모의고사를 치른 후에 발생했다. 청해는 여전히 잘했고,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이긴 했으나, 독해영역 성적이 꽤 올랐다. 학원에서는 또다시 B반으로 배정했다. 하루 이틀을 가더니 아이는 또다시 반 하향을 원했다. 본인은 어휘와 문법공부를 해서 실력을 높이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독해방법을 배우는 것은 별 의미 없다는 주장이었다. B반 선생님은 모의고사 성적을 기준으로 다시 C반으로 가는 것을 거부했다. 아이는 눈에 띄게 학원 가기를 주저했다. 선생님과 대척되는 것도 마음이 불편한데, 독해수업을 듣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여겼다. 단어 뜻을 모르는데 해석을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타임리미트가 있는 일에 있어서는 결정을 내리는데 신속해야 한다. 담임선생님이 반 이동을 반대하시는 상황이라, 원장선생님을 만났다. 두 번의 모의고사 결과를 분석해 보시더니 아이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시고, 반 하향을 결정해 주셨다. 그러나, 각 반 담임선생님들과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아이에게 다음 모의고사에서 몇 점 이상이면 무조건 B반 이상으로 가야 한다고 주지시키시는 것이었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책을 엄청나게 읽었다. 집에 손님이 오면 책이 OO권 이상 있다고 자랑하던 아이였다. 자연스럽게 문해력이 좋아졌다. 덕분에 국어 시험은 특별히 시간을 들여 공부를 하지 않아도 늘 성적이 좋았다. 영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어를 외는 게 관건이었다. 틀리는 것은 모르는 단어의 뜻을 유추하지 못했거나, 문법에 혼동이 온 경우였다. 일본어라고 다를까. 각 언어는 달라도 기본 문법을 알면 좀 빨리 터득할 수 있지만, 어휘를 모르면 문장의 의미 자체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이는 학원에서 공부에 집중을 해야 할 때에 선생님과 부딪히는 상황이 못마땅했다. 자자. 리프레쉬를 해야 할 시간이구나.
라라 님은 노고단은 길이 잘 닦여있고, 올라가는 길이 험하지 않으며, 성삼재휴게소에서는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 않는다는 정보를 주셨다. 우리는 가볍게 여기고 느긋이 브런치를 먹고 출발했다. 그러나 어린이날 연휴라 지리산에도 많은 인파가 몰렸다. 노고단 입구 아랫마을에서부터 꼬불꼬불 오르는 길에서 성삼재주차장까지 두 시간을 차에 갇혀 있었다. 가본 경험이 없으니 어디쯤 주차를 하고 걸어도 될지 전혀 예측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은 너무나도 맑고 예쁜 봄날인데, 내가 등반할 계획이었으니 어딘가에 차를 버리고 걸어 오를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좁은 산길을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오토바이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성삼재에 내린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층 고조되었다. 이야기도 듣고 사진으로도 보긴 했지만, 반듯하게 닦인 노고단 오르는 길은 탐방로가 정말 잘 정비되어 있다. 자연 속에 들어간 기분은 너무 좋았지만, 이게 등산이 맞는 건가란 생각을 계속했다. 넓고 완만하게 잘 닦인 탐방로는 걷기에 정말 좋았고, 등산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노고단고개에서 완만한 길과 계단길을 선택할 수 있어서 좀 등산맛을 내려면 계단길을 이용하면 된다. 노고단대피소에서 노고단정상까지 가는 길은 탐방예약을 해야 한다. 국립공원은 하루 관람객 인원제한을 하는데, 예약을 하지 않아도 인원이 남아있으면 현장에서도 입장은 가능하다. 우리가 노고단고개에 도착했을 때는 탐방인원이 가득 찬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시간이 늦은 오후였다. 지킴이분께서 시간 내에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입장시켜 주었지만, 우리는 거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내 어린 기억 속에 있던 좁고 가파른 등반길은 아니었지만, 숲길을 걷는 것은 생각을 좀 정리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라라님댁에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작은 아이는 얼른 텐트를 걷어 정리하고, 캠프장의 묘미인 바비큐를 즐기기로 했다. 큰 아이는 고기를 구우며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학원 이야기, 작품 이야기. 끝없이 나오는 이야깃거리 중에 학원에 대한 고민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은 계속 C반을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점점 강해지는 빗줄기에 좀 일찍 철수하기로 했다. 라라 님은 슬쩍 가능한 아이가 원하는 쪽으로 지원해 주는 것이 좋을 거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5월 모의고사를 치른 후, 예상대로 아이는 또다시 반 승급을 해야 했다. 이번에는 원장선생님도 실력별로 레벨을 나누어둔 것이라 석 달째 C반에 두기는 반 분위기 상 곤란하다고 했다. 잠시 마음을 돌리고 온 것이 무색하게도 아이는 학원수업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학원에서는 고육지책으로 기본 일본어수업을 빼고, 일본인 선생님과의 수업을 제안해 주셨다. 그러나 이내 그 수업도 내켜하지 않았다. 일본인 선생님과의 수업이라고 해서 회화수업인 줄 알고 갔는데, 일본어로 진행하는 독해수업이었던 것이다. 일본어가 완벽하지 않은 아이가 일본어로 독해수업을 진행하면 모르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질의응답이 불가능하다. 그 선생님은 한국어를 대충은 알아듣지만, 소통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아이는 학원수업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레벨업을 요청한 것도 아니고, 낮은 반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공부를 하고 싶다는데, 학교도 아니고 학원에서 이럴일인가. 나 역시 고민이 깊어갔다. 그러나 최대한 고민은 짧게 하자.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이 수준에 맞게 필요한 수업을 해줄 수 있는 일본어 강사를 찾기 시작했다. 일본유학을 준비하는 학원도 여럿 있고, 몇 군데는 직접 가서 상담도 받아보았다. 선생님들은 실력이 천차만별이었고, 좋은 프로필을 가진 선생님은 수업료가 너무 비쌌다. 좋은 프로필이 잘 가르치는 것과 동의어는 아닌데...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후지산 여행에 함께했던 친구가 피아노 학원생들이 모여 미니콘서트를 연다고 했다. 주말을 맞아 환기도 할 겸, 아이들과 함께 공연장으로 갔다. 주택을 개조한 카페 겸 음식점인데, 사장님께서는 음악을 좋아하셔서 원하는 분들이 공연장으로 활용하는 것을 적극 지지해 주시는 분이셨다. 연주는 2시간쯤 진행되었고, 연주뒤풀이로 거기에서 식사를 했다. 친구에게 일본어 선생님을 소개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친구가 배운 지는 너무 오래되어서, 마땅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고 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며 손님들을 챙기던 친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래. 미짱, 미짱이 해주면 되겠다."
미짱은 공연을 보러 온 친구의 손님으로 일본인이다. 대마도 출신인데, 대학은 한국에 유학을 와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학년 딸을 키우고 있었다.
"미짱. 혹시 일본어 수업 가능해요? 어휘 위주로 봐주고, 일작을 자연스럽게 하는지 도와주시면 돼요.
6월과 7월에 시험이 있어서 좀 급해요."
"음... 일본어 수업은 해본 적이 없는데요. 일본인에게 한국어수업만 해봤어요. 제가 해도 될까요?"
"미짱이 해주기만 하면야, 우린 너무 감사하죠. 이 아이에게 필요한 영역을 봐주면 돼요"
하느님, 부처님!!!!
그 어떤 신이 되었든 도와주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미짱의 독특한 이력은 우리에겐 가장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인이니 일본어는 당연히 잘하고, 한국에 살고 있으니 한국어로 충분히 소통이 가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나 뉘앙스를 표현하기 어려우면 영어도 동원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완벽한 능력인가. 일본어회화도 작문도 걱정 없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아이는 5월 말로 일본어학원은 그만두기로 했다. 미짱은 일주일에 세 번 딸을 등교시킨 후에 우리 집으로 와서 아이와 두 시간씩 수업을 했다. 어휘교재는 미짱이 적절한 것을 골라왔고, 예상처럼 일본어로 대화하다가 미묘한 것은 한국어로 질의응답하는 것이 가능했다. 미술학원에서 준비하는 감각테스트용 글도 꼼꼼히 봐주었다. 한국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문장을 가장 일본에서 사용하는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수정해 주었다.
하아, 또 한 고비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