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

by 물빛

작은 아이가 엄마엄마 하고 호들갑스레 부르며 달려온다. 요즘의 고등학교에서는 시험 성적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각 교과선생님이 적어주시는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세특)과 담임선생님이 적어주시는 행동특성발달상황(행특)이다. 대입에서 수시의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지원하면 생기부가 중요한 요소이다. 숫자로 볼 수 없는 학생의 지적호기심, 학업역량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내용은 과목당 1500바이트 한정이다. 선생님들이 각 개인의 특성을 파악해서 적어야 하기 때문에 보통 힘들고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학생, 선생님, 학부모 간에 작성 내용이나 양에 대한 민원도 속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2학기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면 세특 작성과 확인에 바쁘다. 학기말 전에 완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지역마다 겨울방학 일정에 있어 차이가 큰데, 부산은 예전처럼 12월 말에 방학을 하고 2월에 개학 후 봄방학을 하는 학교가 많다. 아이의 학교는 작년은 예년처럼 학사운영을 했지만, 올해는 학교 공사 일정이 있어서 12월 말에 방학을 하고 3월에 바로 개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아이는 중학교 시절을 아주 험난하게 보냈다. 중학교 시작과 더불어 급우와 다툰 일이 3년 내내 괴롭힘으로 이어졌다. 사건사고가 많은 십 대들 아닌가. 한 해가 지나니 선생님들의 평가가 확연히 달라지며 두 아이를 분리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상대아이는 일부러 찾아와 약 올리거나 손찌검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는 아이의 멘털관리를 하느라 애썼지만, 아이는 공부에는 거의 손을 놓았다. 상대 아이도 가정에서 관리한다고는 들었지만, 개인정보보호 차원에서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지는 않았다. 선생님의 뉘앙스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또 다른 악연이 하나 더 있었는데, 3학년 2학기에 전학을 하는 소동도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이도 나도 피폐해졌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이가 변모하는 아주 좋은 계기가 되었다.


전학 간 학교에서 존재 자체를 존중받은 아이는 조금씩 어릴 때의 해맑음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스스로 운동을 하며 체력도 키워갔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보낸 1년. 손을 놓았던 공부를 제대로 하자니 성적은 생각만큼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가 밝아지고, 학교에서도 웃고 있으니까 괜찮았다. 이제 2학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이라 성적에 좀 더 신경이 쓰이긴 한다. 하지만, 기대보다 쑥 상승하고 있지는 않다.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니 쉽지 않겠지.


지난겨울에는 교과 선생님들이 세특 내용을 확인시켜 주시느라 겨울 방학 중에도 연락을 해주셨다. 방학 전에 내용에 대한 것을 작성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내용을 확정해서 등재하는 것은 학기말에 하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내용을 줄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표정은 숨길 수 없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선생님들이 넘쳐나게 써주신 내용을 보니 각 수업 시간마다 충실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소문에 체육특기생들만 적어준다는 체육과목까지 가득 채워서 써주셨다. 정말 노력했으나 구기는 재능이 없는지, 점수가 최하위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글자수만 채운다고 잘 쓴 세특이 아니다. 자기 주도역량, 비판적 사고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소통과 협업 역량 등으로 세부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만족할 만한 평가가 된다. 아이를 보니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실하게 한 해를 잘 지냈구나 하며 안아주었다.


지난주에 기말고사를 마치자마자, 성적확인과 세특확인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올해는 방학 전에 평가를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이라 선생님들이 더욱 분주하고 바쁘신 모양이다. 각 과목 수업 시간마다 내용점검을 하고 수정사항이나 오탈자를 확인한다. 아직 확정된 것은 없지만, 한 과목씩 확인작업을 하는 중이다. 아이는 교양선택과목으로 심리학을 정했다. 하교한 아이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학기 초에 수강신청한 이유를 작성하라고 하셨단다. 아이는 본인의 상황에서 느낀 인간의 마음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었다는 골자로 작성을 했었단다. 아이가 하는 게임 중 로보토미코퍼레이션이라는 것이 있다. 플레이어는 괴물들을 관리하는 시설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 사고들을 관리자의 입장이 되어 게임을 진행한다. 캐릭터 특성에 따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심리학을 공부하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나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썼단다. 아이가 당황해 한 지점은 선생님이 글자수 맞게 적느라 그 내용을 축약하려고, 검색해서 게임유저들 사이의 약어까지 찾아서 넣어주셨다는 사실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성적이 좀 많이 오르면 좋겠다. 대학을 가기로 목표를 세웠으면 그 목표를 향해서 달리는 것이 인지상정. 아이는 늘 "저도 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스스로도 자신의 목표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늦게 시작했으니, 속도가 붙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타임리미트가 있는 일이라면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도 본인 생각해도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올해의 1년도 성실하게 잘 살아내었나 보다. 본인이 만족할 만큼의 성적까지 향상하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오름새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각 교과 수업시간에 졸지 않고 성실히 임했고, 수행도 스스로 잘 치러내었다. 내가 직접 보지 못하는 학교의 생활은 각 교과 선생님들의 평가가 아이의 1년을 말해주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성장하고 있으니 내년을 잘 준비하도록 지켜보아야지.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14화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