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좀 어렵다.
홈스쿨링 중인 첫째가 며칠 전 손을 다쳤다. 손가락 하나에 붕대를 감았을 뿐이지만 아이는 매일 하던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겼다. 아이를 보며 몸이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새삼스레 생각했다. 몸은 손가락 하나만 다쳐도, 삶에 많은 제약을 가져다준다.
말은 참 쉽다.
정확한 말, 옳은 말, 잘 정리된 문장은 언제나 삶보다 단단해 보인다. 어쩌다 보니 다른 사람 앞에 서서 종종 말을 할 기회가 생기는데, 몸이 지치고 힘들 때도 말은 흔들림 없이 자신을 잘도 포장한다.
언뜻 보면 말이 몸보다 훨씬 영향력이 커 보인다.
하지만 삶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른 장면들을 보게 된다. 정말 아픈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올곧은 말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상처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설명과 훈계가 아니라 그저 그 옆에 같이 앉아 어깨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 어떤 종류의 말보다 함께 있어줄 몸이 절실히 필요하다.
요한복음 1장은 세상이 말에서 시작되었고,
그 말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말하는 말은 정보가 아니라 방향에 가깝다. 살아가야 하는 방향, 사람이 살아야 하는 이유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태초의 말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말의 선택이다.
세상을 시작한 그 말은 그저 위대한 말로 머무르지 않고 몸이 되어 세상에 오는 선택을 했다. 땀 흘리고, 아프고, 쉽게 지치는 그 불편한 몸으로 말은 들어왔다.
‘왜 굳이….’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계획을 세우나 이루지 못하고, 의지를 가지나 매번 무너지는 불완전한 몸에 완전한 말이 굳이 왜.
그것은 이 말이 몸을 만들었기에 몸의 불완전함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임시로 머무는 장막과 같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불완전한 거처인 몸으로 찾아와서 나그네와 같은 인생에 지친 몸에게 몸으로 품을 내어주는 존재가 되고자 했다.
요한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그 말을 본 적은 없지만, 그 말이 몸을 입고 세상에 왔기에 그것이 대낮처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였다고.
말이 몸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기적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이해받고 싶었던 불안전한 몸 곁으로 세상을 시작한 말이 직접 걸어 들어온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다.
말로는 무엇이든 다 해낼 것 같지만, 몸은 여전히 버거운 하루를 살며, 나는 이 이야기에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건네는 질문 앞에 머무른다.
나는 말로 내 삶을 설명하려 하는가. 아니면 몸으로 살아낸 그 삶을 닮으려 하는가.
누군가의 하루, 그 곁에 나는 몸으로 머물고 있는가.
<요한복음 1: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