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가 없으면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
"나 최근에 깨달았어. 내 눈이 왜 다친 건지.”
운전을 하던 내가 말했다.
“응? 그거 봄에 정원 손질하다 다쳤다고 하지 않았어?”
옆에 앉은 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다친 이유 말고, 의미 말이야. 다친 후로 몸을 좀 무리하게 쓰면 꼭 그쪽 눈이 아파. 아무래도 몸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알람이 눈에 달린 것 같아.”
나는 진지했으나 조수석에선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이거 참.’
페인트 통 뚜껑이 잘 열리지 않았다.
몇 분을 씨름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날 쓰다 던져둔 그라인더는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먼지는 창문으로 들어온 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너무 일찍 주문한 책장들이 아직 아무것도 되지 않은 공간 한편에 줄지어 서 있었다. 유리창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가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하. 서점이라…’
몇 달째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 공간에서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이 지역을 위해? 이 동네를 위해? 아이들을 위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 너무 거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 뭐?’
집에서 싸 온 보온병을 열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저쪽 벽에 아직 붙어 있는 타일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마스크를 끼고 그라인더를 켰다. 웽, 웽, 웽. 금세 벽이 매끈해졌다.
뽀얗게 가루가 내려앉은 공간에 내 엉덩이 자국만 맨질 하게 남은 플라스틱 의자가 보였다.
‘이 낯선 도시에 내 엉덩이 하나 앉힐 자리를 만드는 일.’
나는 씩 웃고는 일자 드라이버를 찾아 페인트 통 뚜껑을 열었다.
"어떡하면 좋아...."
갑작스러운 복막 출혈로 급하게 수술에 들어가는 보리를 보며 나는 울고 말았다. 보통 큰일은 담담히 받아들이는 편인데 그날은 유난히 느낌이 좋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보리는 마취에서 잘 깨어났다. 똑바로 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똘망한 눈을 보고 나는 괜한 걱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예후를 점검하러 다시 병원을 찾은 날, 보리가 그전보다 더 건강히 잘 지낸다는 내 말에 수의사는 같이 웃지 못했다.
“수술 중에 떼어낸 비장 조직을 검사해 봤는데, 공격성이 강한 악성 종양이에요. 예후가 좋지 않은 종양이라 항암 치료를 하더라도… 큰 기대는 어렵습니다.”
나는 멍하게 의사의 설명을 들었다. 다음 단계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보리는 좋아하는 삶은 계란을 달라고 애교를 부리고, 공을 물고 와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소파를 몽땅 차지한 채 내 무릎을 베고 누운 보리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문득, 내 오랜 버킷리스트가 떠올랐다.
대형견을 키우고, 끝까지 함께하기
반쪽만 이루어졌던 내 소원이 이제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깨달음이 차가운 발에 수면양말처럼 내게 입혀졌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늘 꽃길을 걷는 일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 실밥이 남아 있는 보리의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