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스런 방해자

나를 키운건 팔할이 너였다

by 주혜나

"아니.... 침대가 아직 축축하잖아...."

낮에도 대학생 아니냐는 오해를 받은 첫째 딸이 자기 이불을 두 손으로 껴안고 내 방 입구를 서성거리며 말했다. 아이가 키우는 고양이가 아이의 이불에 오줌을 싸는 바람에 수습하느라 진을 뺀 직후였다. 겨우 거실 불을 끄고 내 방으로 들어와 앉은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녀석은 방금 꺼낸 뽀송한 손님용 이불을 품에 안고 나를 찾아왔다.

없는 애교를 부리느라 몸을 베베꼬고 혀 짧은 소리를 하는 녀석이 징그럽게 귀여웠다.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더니 녀석은 잽싸게 내 베개 옆에 자기 베개를 내려놓고 후다닥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아이고. 오늘도 망했군.'

얼굴에 로션을 바르며 거울 속 나를 보았다. 사람 다섯에 대형견 하나, 고양이 하나, 도마뱀 하나까지. 생명체가 많기도 한 이 집에서 내가 오롯이 나 하나로 존재하는 시간은 잠들기 전 세수하고 로션 바르고 머리 빗고 침대에서 잠깐 기도하고 책 읽다 잠드는 딱 그 시간뿐인데 그마저도 이렇게 수시로 침범당하기 일쑤이니 서글픈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이번 주에 써야 할 글의 주제가 뭔지 알아? ‘내 인생의 귀인’이야. 아무래도 너 얘길 써야겠어.”

괜히 이불을 더 펄럭거리며 아이 곁에 누워 말했다.

“너는 진짜… 내 인생의 스승이야. 나를 항상 가르쳐. 아주 오래, 아주 꾸준히.”

아이는 눈을 감은 채로 킥킥 웃었다.


"엄마 나 학교 그만 다니고 싶어. 홈스쿨링을 하고 싶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지금은 혼자 공부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다른 사람들 없이 나 혼자서 공부해 보고 싶어."

열네 살, 여름방학. 아이는 갑자기 홈스쿨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야. 너 그게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혼자 공부하는 게 쉬운 일인지 알아?"

"알아. 근데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이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어머니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라임이가 열이 많이 나요. 39도는 되는 것 같아요."

여섯 살, 잠시 알바라도 나갈라치면 귀신같이 걸려오던 전화.

"안돼. 엄마는 고양이 못 키워."

"그럼 내가 각서 쓸게. 두 개도 쓸 수 있어."

아홉 살, 이웃이 키우라고 데려온 아기고양이를 품에 안고 또박또박 쓴 각서에 찍은 빨간 지장.

"우리 여기 한 바퀴 돌면서 조금만 생각해 보고 오자. 응?"

열한 살, 고가의 발도르프 인형 앞에서 꼼작도 안 하고 뚝뚝 흘리던 눈물.


그리고 열네 살, 하고야 말겠다는 그 표정. 녀석은 그렇게 또 한 번 나를 이기고 말았다.


그 이후로 이어진 홈스쿨링 생활은 대부분이 예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업에 욕심이 있는 아이라 공부는 스스로 곧 잘했지만, 아이가 24시간 학습만 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안 자니? 열두 시 넘었는데?"

"아니.... 자려는데 잠이 안 와."

"그렇게 늦게까지 자고, 낮에 그렇게 안 움직이는데 잠이 오겠니?"

"치...."

매일 닫혀 있는 방문과 심해지는 아의 다크 서클, 방 안에 고인 묘한 냄새.

'저 아이는 우리 옆집 아이다. 잘해 주자. 화내지 말자.'

누군가가 알려준 주문을 매일같이 읊조렸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부딪혔다.


"이제 마음껏 놀아!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최근 처음으로 나는 아이에게 실컷 놀라는 말을 했다. 아마도 녀석이 드디어(!) 원하는 기숙(!) 고등학교에 합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짜? 오예! 그럼 보고 싶은 영화 실컷 보고 놀아야겠다!"

밝아진 표정으로 제 방에 뛰어 들어가는 아이를 보며 가슴 정 중앙이 조금 아릿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던 스물넷의 내게 불쑥 찾아와 엄마라는 세상을 열어 준 아이. 누군가를 내 몸같이 사랑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려 준 존재. 나의 계획을 수없이 틀어놓고, 완전히 다른 삶을 건네준 내 인생의 가장 사랑스러운 방해자.

"으이구, 공주야. 그래도 사랑해."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옆에 누운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아. 왜 그래에."

잠이 든 아이가 짜증을 내며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손은 뻗어 아이의 어깨를 도닥거렸다.

그러다 이내 나도 돌아누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