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필요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일단 마음공부부터

by 주혜나

아침 열 시.


아직은 시원하다고 느껴지는 초여름의 바람이 분다. 마당에 쳐 놓은 아이보리색 텐트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이들을 보내자마자 한 시간의 마당 일을 하고 적당히 땀을 흘린 후였다. 아직 정오의 뜨거운 태양이 텐트를 덥히기 전이라 기분 좋은 바람만이 텐트 안을 지나간다. 창 너머로 살랑거리는 분홍 낮 달맞이꽃을 보며 유튜브에서 싱잉볼 소리를 찾아 틀어 놓는다. 낮은 음역의 싱잉볼 소리는 금세 주변의 공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자리에 앉기 전 시원한 물을 한 컵 들이켜고, 화장실도 다녀왔다. 이제 싱잉볼 소리가 가득 찬 공간 안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비행기 소리가 나는군. 우리 집에서 비행기 소리가 저렇게 크게 들렸던가?’

‘아침부터 계속 울던 뻐꾸기는 왜 갑자기 조용한 거지?’

‘텐트 안에 대체 몇 마리의 날벌레가 날아다니고 있는 걸까?’

길었던 준비과정이 무색하게 삼십 초도 안 되어 온갖 잡생각이 떠오른다.


‘졸리는데 어떡하지. 참아야 하나, 자연스레 잠이 들어도 되는 걸까?’

오 분쯤 지나자 슬슬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맞아.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주변에서 들려오는 각종 소리에 집중이 흐트러지고, 슬슬 잠이 오더니, 이내 과거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오른다. 어느새 내 마음은 흐트러지고, 흐려지고, 과거의 그 시점으로 빨려 들어가 그때의 사건 안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이내 그런 내면을 자각하고 다시 나의 마음을 의식으로 가져온다. 수도 없이 같은 과정이 반복되지만, 그것이 지난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 명상의 목적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나를 끌고 다니는 그 마음의 실재를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 개월 전 퇴사를 했다. 회사에서 맡았던 업무는 출장이 잦은 일이었다. 아이 셋의 엄마로 그런 자리에서 회사생활을 한다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회사와의 관계는 본의 아니게 차갑게 끝나게 되었고, 그 후 보름 정도는 그래도 편안했다. 출근하지 않는 삶, 낮에 혼자 집에 있는 삶, 낮잠을 잘 수 있는 삶을 즐긴 것은 딱 보름 남짓이었다. 그 시간이 지나자 엄청난 불안감이 나를 덮쳐 회사와의 불편한 감정도, 출근하지 않는 삶의 편안함도 더 이상 느낄 여유가 없어졌다. 내 상태와는 무관하게 매월 같은 날이면 통장에 또박또박 입금되어서 다른 군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월급이 이제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불안이었다.


‘다시는 회사에 들어가나 봐라. 프리랜서로 이 월급 못 벌겠어?’


퇴사할 때 부렸던 막연한 호기가 불과 보름 만에 엄청나게 부끄러워졌다. 직장인의 삶은 엔진이 달린 배를 타고 깊은 바다로 나가 기계가 달린 어선에서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면(비록 내 몫은 정해져 있지만), 프리랜서의 삶은 나룻배를 타고 스스로 노를 저어가며 틈틈이 낚시를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 세계와 같다는데. 무엇보다 이런 불안한 심리상태로는 나룻배는커녕 종이배도 물에 띄우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직장을 다시 구해야 하나? 프리랜서로 살아간다면 무슨 분야를 택해야 할까?’

그렇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한껏 끌어안고 몇 시간씩 검색만 계속하는 나날을 보냈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엑셀로 표를 만들어 관심 분야에 대해 정리도 해 보고, 직업들을 조사해 장단점을 나열하는 등 여러모로 애를 써 보았지만 마음의 불안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사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게 아니라, 안다고 해도 시작할 수가 없는 내 마음의 상태가 가장 문제였다.

이유를 계속 모르는 척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다. 퇴사하기 얼마 전부터 내 내면의 의식은 계속해서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더 이상 열심히 살고 싶지 않아. 이제 날 좀 그만 밀어붙여.’


나의 퇴사 소식을 접한 주변 사람 누구 하나도 내게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묻지 않았다. 예의상 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묻지 않았다. 퇴사 소식을 접한 남편은 마지막 출근날 저녁 케이크와 꽃을 사 와서 퇴사를 축하해 주었고, 아이들도 친정엄마도 친한 친구들도 고생했으니 이제 좀 쉬라고 말했다.


“이제 뭐 할 거야?”

“모르겠어. 근데 나 이제 더 이상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사람이 평생 써야 할 열심의 양이 있다면 너는 이미 그 양을 다 쓴 거야. 그러니 이제 좀 놀고, 쉬고, 편안히 지내. 네가 열심히 살았던 시간을 생각해 보면 너는 아직 한참 더 놀아도 돼.”


퇴사 후, 시간이 좀 지나고 가장 먼저 만나러 갔던 오랜 친구의 말이었다. 내가 볼 땐 그 친구야말로 계속해서 공부하고, 외국 다녀오고, 박사가 되고, 연구원이 되어 이제 막 아기를 낳은 엄마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열심히 살아온 친구였다.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을까? 아니, 없어. 이 정도 인생은 누구나 다 살아가지. 난 특별히 고생하지 않았는걸.’

다들 내게 고생했다고, 이제 좀 쉬어도 된다고 위로를 건네는데 나는 내게 그럴 수 없었다. 내게 그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짐승들도 밥벌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생업의 터전에 나가서 새끼를 먹일 음식을 구해온다. 그게 자연의 섭리이다. 그런데 나는 뭐라고 안락하게 집 안에서 이렇게 앉아 다큐멘터리나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까?’


좋아하는 자연다큐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마음을 찔러도 아픈지 몰랐다. 사라진 월급, 적어도 그 정도의 월급은 나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이러니하게도 또 내 한 편의 진심은 계속해서 ‘더 이상 열심히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을 했다. 머리는 일 분이라도 아껴 달려가려 하고, 마음은 그냥 여기 주저앉아 있고 싶어 했다. 무엇을 직업으로 삼을 것인지 선택하기 전에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달리고 싶은가? 주저앉아 있고 싶은가?’


만약 내 본심이 여러 개라면, 나는 삶의 방향을 어떻게 정해야 좋을지 선택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직업을 찾는 일에 앞서 먼저 마음을 공부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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