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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이프라인 Sep 18. 2023

분명 착각하고 있다

가타부타 떠들지 말자고...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생각보다 가치 있다는 착각이고 나머지 하나는 나는 생각보다 가치가 없다는 착각입니다.


 첫 번째의 착각에 빠지게 되면 나를 높이고 남을 낮추며 노력보다는 운이나 환경의 탓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두 번째의 착각에 빠지면 쉽게 자신감을 잃고 자괴적인 생각에 빠져 스스로 망가뜨리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야, 조용히 해!"


 실에서 아이들이 서로 조용히 라고 말을 주고받습니다.


 "야, 떠들지 마!"


 "얘가 자꾸 뭐라고 하잖아!"


 "왜 나만 갖고 뭐라고 해!"


 "니가 더 떠들어!"


 "조용히 하란 말도 하지 마."


 "넌 왜 자꾸 말해?"


 "회장이잖아."


 "회장도 말하면 안 되지."


 "그럼 너희들이 조용히 하면 되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


 "못 하니까 그렇지."


 "니네 계속 떠들잖아. 그만 좀 떠들어."


 저는 만히 학생들을 니다. 학생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남들보다 소중히 여길 때가 있습니다. 합당한 이유로 타인에게 설명하거나 설득해야 하는 당위성을 모르고 남들의 가치 역시 해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가치만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 세상에 남들은 조연도 아닌 사람 1 정도의 역할을 맡은 엑스트라이고 나는 소중한 주인공인 이야기를 혼자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에 더 가치를 둘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수업이 너의 이야기보다 가치 있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교사는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를 이야기하면서 상황에 따른 바른 태도를 학생들에게 알려줍니다.




 우리는 세상에 던져진 순간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하며 태어납니다. 남들을 NPC로 인식하고 온전히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인생 게임을 시작하죠. 욕망이 충족되어 기쁘면 웃고 충족되지 않으면 짜증과 슬픔, 분노로 웁니다.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옆에 있었던 부모로부터 헌신적인 사랑을 받다가 친구를 만나 사랑을 온전히 받기만 하던 삶에서 사랑을 조금 나누어  연습을 합니다. 때로는 준 것에 비해 받는 것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을 때가 있어 슬픔과 서러움을 느낍니다. 어느 때는 준 것에 비해 과분하여 부담이 되어 거부하기도 합니다.


 주고받는 마음이 편하고 긴 인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부모형제 외의 사람과 가족을 이루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어린 사람에게는 온전히 주기만 하는 그런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속한 자연 세계의 이치입니다.


 지금은 내가 돋보여야 하고 앞서가야 하고 최소한 따라가야 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모두가 그런 시대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탐색을 계속해서 재능을 찾아야 하고 남들보다 뛰어난 영재성을 보여야 하며 진로에서 업적을 쌓아 위치를 선점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문명이 발달한 시대에서도 교육에 열을 올리고 돈을 태워가며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학생들의 삶을 짓밟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다음 세대에게 사랑을 온전히 주는 역할인데 물려받은 사랑을 이어 주기는커녕 반대로 벌이나 학대, 어쩌면 고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2030, 심지어 40대까지도 어른들이 보기에는 답답합니다. 학업, 취업, 결혼, 출산. 이 모든 것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학업은 갈수록 어려워지 취업의 문은 좁아지 마음에 드는 상대는 조건이 매우 높습니다. 받은 사랑은 이어주지 못하고 온전히 나를 위한 세상에서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위안을 삼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 판단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요?


 내가 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첫 번째 착각, 나는 생각보다 가치 있다는 착각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 개인이 아니라 많은 사회 구성원이 이런 생각을 한다면 우리 사회 전체가 첫 번째 착각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미래의 후손들은 현재 우리의 가치 판단을 올바르다 생각할까요? 아니면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자신들의 시대까지 암울함을 끼친 어리석은 세대로 판단할까요?




 제가 어렸을 때 어른들께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겸손해라'였습니다. 어린 마음에는 '잘난척하지 마라' 정도로 여겼던 '겸손'이라는 말은 알고 보니 무시무시한 큰 뜻이었습니다.


 겸손하려면 자신 매우 뛰어나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을 낮추는 말과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 ~님의 덕분입니다."


 위에 말은 겸손한 사람이 하는 대표적인 어구입니다. 단언컨대 요즘 세상에 저 말을 하면서 자신이 받을 스포트라이트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든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사귀어 배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가치를 더 이상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옆에 있는 상대를 짓밟아 올라가고 선취하 내려다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같은 자리로 올라오기 전에 더 높은 곳을 향해 손을 뻗어 쟁취해야 합니다.


 곽외의 '매사마골'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옛날 춘추전국시대 연소왕은 곽외라는 신하에게 어떻게 하면 인재를 모을 수 있지 문의하자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줍니다.


 - 옛날 어느 임금이 신하에게 천금을 주어 천리마를 사 오라 했는데, 그는 죽은 의 뼈다귀를 사 왔다. 왕이 죽은 말 뼈를 왜 샀냐고 따지자 신하는 죽었더라도 천리마의 뼈는 그 가치를 인정을 받는다고 소문을 내면 진짜 천리마를 가진 자들이 알아서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생생한 천리마를 가지고 온 자들이 셋이나 나타났다고 한다. - 출처 : 나무위키

 이 일화에서 곽외는 본인을 말 뼈다귀로 비유하 별 볼 일 없는 자신을 우대한다고 소문을 내면 뛰어난 인재들이 알아서 모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별 볼 일 없다 하면서도 기책을 낼 줄 아는 곽외는 어떠한 사람일지 능히 짐작이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이후 연나라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강대국이 될 때 곽외는 새로운 인재의 등장으로 인해 낙담했을까요? 자신의 가치가 낮아졌다 슬퍼했을까요? 애초에 왕이 자신을 앞에 두고도 인재가 필요하다 했을 때 어떠한 기분이었을지 상상해 본다면 참으로 답답하고 어이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인재들을 높여 결국 자신까지 높이는 현명한 겸손을 택했습니다.


 이러한 옛이야기가 조금 이해되지 않는다면 만화 슬램덩크의 채치수를 생각하시면 편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팀의 주장으로 중심을 지켜왔지만 주인공이지 않았고 팀을 성장시켰지만 본인한 단계 낮아지는 것을 택했습니다. 마지막 에서 자신은 낮아졌지만 팀은 승리했고 작가는  승리한 팀의 훌륭한 일원으로 서술합니다.


 우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면 좌절감이 들고 경쟁에서 뒤처지면 시합에서 패한 것 같아 남들의 시선을 피해 숨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뛰어난 사람들의 재능을 시기하고 앞서 가는 사람들을 질투합니다. 고대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어린 나이에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며 모든 것을 가 로마의 아이돌이었을 때 카이사르 가진 것실패에 대한 조롱뿐이었습니다. 둘이 자웅을 겨룰 때 모두가 폼페이우스 편으로 달려갔지만 승리자는 카이사르였습니다.


 우리는 폼페이우스를 잊고 살지만 카이사르(July)는 기억합니다. 폼페이우스를 추앙하는 현시대에 카이사르로 사는 것은 이상할까요. 그는 40살까지 실패했지만 자신이 생각보다 가치가 없다고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착각보다 가치 있지도, 착각보다 가치 없지도 않습니다.


  수많은 현인들을 통해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공수래공수거 등의 이야기를 수없이 습니다. 광활한 코스모스 속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티끌에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니다. 모두가 우주의 거대한 역사 속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예정입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신이 보기에는 개미 떼 같은 인류의 영웅으로, 스타로 혹은 한 명의 이름 없는 아버지, 어머니, 작가로 삶을 마감할지 모릅니다. 대기만성으로 이 시대를 이끌 인물이 될 수도 있고, 누구의 그림자가 되어 빛도 없이, 알아주는 이 없이 나의 만족으로 족한 삶을 살아가다 누군가 뒤늦게 알아봐 주는 인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착각에서 벗어나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애초에 스스로 획득한 것이 없었고 나의 노력조차도 어쩌면 조들이 그 옛날 생존을 위한 생사의 기로에서 발휘한 초인적인 인내심과 땀방울, 혹은 피를 흘려 얻은 하나의 유전정보로 인한 것일지 모릅니다.


 동시에 오늘 나의 실패가 내일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실패에도 쓰러지지 않고 몸부림쳤던 노력은 유전 정보에 기록되어 후손 중 누군가가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이겨낼지 모릅니다.


출처 : https://m.facebook.com/photo.php/?photo_id=927140397302822


 순간의 착각은 자유라고 하지만 본인에 대한 잘못된 착각은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병든 사람은 병든 사회를 만들고 병든 사회는 사회구성원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사실 누군가진작에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이란 녀석이 어느 순간 슬쩍 다가와 몰래 쥐어진 자신의 역할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어디에 가치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당신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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