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짜사나이 비평을 기획했을 때 1편과 2편으로 나눠 1편에서는 가짜사나이 성공의 특이성을, 2편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와 그 의미에 대해 분석하려 했다. 그러다 가짜사나이 4화가 나오고 상황이 바뀌었다. 4화의 문제점을 인지한 필자는 급하게 노선을 바꾸어 4화까지 진행된 가짜사나이 2기의 문제점을 집어보려 하였다. 그러나 일요일, 피지컬 갤러리는 앞으로 가짜사나이를 업로드하지 않고, 거기에 더해 현재까지 올렸던 모든 가짜사나이 영상을 내리겠다는 공지를 올렸다. 그리고 필자는 그때까지 써놓은 글을 모두 엎을 수밖에 없었다.
가짜사나이는 한국 유튜브가 꽃피운 걸작이었다. 그랬기에 가짜사나이 콘텐츠 성공의 의미는 남달랐고, 가짜사나이를 시점으로 미디어 문화는 큰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그런 가짜사나이가 몰락했다. 성공의 의미가 컸던 만큼 몰락이 가지는 의미 또한 크다. 가짜사나이 사태엔 현재 미디어 문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이 거의 모두 모여있다.
글을 세 번이나 엎으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절대 이렇게까지 커질 일이 아니었다. 조회수 1600만의 영상들이 내려갔고, 이근 대위는 법정 다툼에 들어갔으며 로건 교관은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을 잃게 되었다. 무엇이 일을 이지경까지 몰고 간 것인가.
현재 미디어 문화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짜사나이를 잠식시켰나. 더 나은 미디어문화로 나아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쉽지 않은 작업이겠지만 이 글을 통해 짧게나마 풀어보려 한다.
가짜사나이를 무너트린 것은 크게 두 집단이다. 미디어 생산자와 미디어 소비자. 오늘날, 그러니깐 유튜브와 실시간 스트리밍 이후의 시대엔 이 두 관계가 서로에세 훨씬 더 즉각적이고 크게 영향을 끼친다. 생산자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소비자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동시에 소비자는 언제든지 생산자를 무너트릴 태새를 갖추고 있다. 심지어는 언제든지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어 그들의 동료가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두 관계를 나누어서 설명하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지만, 조금 더 명확하게 사태를 바라보기 위해 우선은 구분하여 분석해볼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두 관계가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또한 살펴보겠다. 우선은 소비자이다.
1. 소비자는 정의에 목말라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사람들은 언제나 나름의 정의(justice)를 추구한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나름의 정의를 기준으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반대쪽 손을 들어준 사람을 몰상식하다며 매도하곤 한다. 이런 경향은 오늘날만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에도 그렇고 과거에도 물론 그랬다. 달라진 게 있다면 하나이다.
과거, 그러니깐 SNS 이전의 시대엔, 그런 편들기와 매도를 집에서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거나, 혹은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지나가는 이야기로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리에겐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정의를, 심지어 익명으로, 마음껏 자유롭게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매체가 있다. 바로 인스타, 페이스북, 트위터, 그리고 유튜브이다.
이 변화는 아주 놀라운 결과를 불러온다. 술자리 사석에서나 나올법한 거친 뒷담화 같은 발언들이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게시되는 것이다. 사실 문제점이 있으면 거침없이 지적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뒷담화', 즉 남들 뒤에서는 거침없이 잘 씹지만 앞에서는 좋은 말만 하게 되는 이유는 생명연장을 위한 진화의 산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라왔고, 그렇게 배워왔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다르다. '익명성'은 놀라운 자유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잘못했다간 처맞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책임을 지워버렸다. 앞에서 하지 못할 말 뒤에서도 하지 말자가 아니라, 뒤에서도 하기 힘든 말을 앞에서도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늘날이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재 유튜브에서 시청자의 권력은 거대하다. 동시에 그들은 나름의 정의를 추구한다. 즉 그들은 정의로운 마음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 수가 너무 많다는 것, 그리고 수가 많을수록 정의에서 벗어나기가 쉽다는 것이다. 우리 개인은 모두 현명할지 몰라도 무리 속에서는 늘 어리석어지곤 한다. 이른바 '물타기'라고 불리는 그 현상은 누구에게나 쉽게 나타난다. 그렇게 무엇이 옳은 것이고 정의로운 것인지 개인적으로 판단하기도 전에 몇몇의 정의에 휩쓸리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정의로운 일을 한다는 건 언제나 신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고로 정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맹렬히 거친 언어를 써가며 공격한다. 언어는 거칠면 거칠수록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에 효과적이다. 사람들의 관심까지 받으니 이제는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가 된다. 그러다 보면 점차 처음 자신이 생각한 정의가 뭐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스스로 거친 언어에 이성을 잡아먹히게 된 것이다.
가짜사나이로 돌아가 보자. 분명 가짜사나이 4화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몇몇 교관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 또한 쉽게 혹할만한 것들이었다. 우연인지 의도인지 4화가 업로드됨과 동시에 논란이 커지며 가짜사나이는 정의구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4화에 대한 비판의 여론이 형성되며 물타기가 시작되었고, 그중에서 더욱 정의로워지길 원하는 거친 댓글들이 쏟아졌다. 정의를 표방한 조롱, 비방, 근거 없는 비판이 큰 파도에 떠밀려온 쓰레기들처럼 댓글창과 커뮤니티를 더럽혔다. 그 파도가 멈출새 없이 교관들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또다시 형성되었다. 그 지저분한 소문들에 대해선 뒤에서 다루겠다. 끊임없는 비판과 해명, 사과 요구의 파도는 김계란의 해명과 참가자들의 옹호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소비자들의 정의에 대한 욕심이 만든 거대한 해일은 김계란을 질식하게 만들었다.
2. 혐오가 상품이 되는 세상
사이버 랙카는 이슈를 다루는 유튜버들이 사건만 터지면 어디든 누구보다 먼저 달려오는 모습을 빗대어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많은 사설 랙카들이 도로교통을 해치며 사고 현장에 접근하고, 또 가격을 후려치고 끌고 가는 차량에 또 다른 흠집을 내는 등의 눈살 찌푸려지는 행동은 '랙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안 좋은 이미지를 지닌 단어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런 랙카라는 단어가 이슈 유튜버들의 별명이 된대에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사이버 랙카라는 단어조차 혐오의 의도를 담은 표현이기에 본글에서는 자제하도록 하겠다.
이제는 공적 영향력을 미치는 대형 언론사들도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시대이다. 하지만 유튜브 세상은 냉혹하다. 구독자와 조회수로 승부를 보는 유튜브에 발을 들인 이상 기존의 대형 언론사라는 계급장을 때고 다른 유튜버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다. 즉, 기업 단위의 대형 언론사와 개인, 혹은 소수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의 영향력 차이가 희미해진 것이다.
그렇게 영향력이 비대해져 버린 유튜브 채널은 두 가지 문제점을 지닌다. 첫째, 소수로 운영된다는 것. 둘째, 속도가 생명이라는 것. 그리고 셋째, 자극적일수록 조회수 장사가 잘된다는 것이다. 소수로 운영되는 유튜브 채널에선 상대적으로 정확한 팩트체크가 덜 될 수밖에 없고 정보전달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사건이 터지면 즉시 영상을 업로드해 먼저 시청자를 선점해야 하므로 질적인 측면에서 더더욱 형편 없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문제는 가장 악질이자 유튜브가 고민하여야 할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다. 자극적인 썸네일에 넘어가 영상에 들어가 보면 막상 내용은 없고 그냥 지금까지 나온 사실관계만 나열하며 사실관계에 대한 의혹만을 말하는 영상이 태반이다. 그런 영상은 그 영상 속 내용이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와 부합된다고 여기는 소비자들을 만나는 순간 폭발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유튜브를 넘어서 현실세계에서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가짜사나이 사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꽁꽁 숨겨있던 의혹들을 굳이 굳이 긁어 파내어 대중들에게 책임 없이 던져대기 시작한 것이다. 의혹은 그 자체로 진위여부를 가려야 하는 것이며 진위여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의혹을 굳이 굳이 긁어 파내는 이슈 유튜버들의 행태는 분명 그 의도에 문제가 있다.
정의라는 이름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저 이슈를 파는 사람들일 뿐이다. 갑자기 늘어난 인기와 영향력이라는 충분조건에 충족되는 순간 이슈 유튜버들은 그들에게서 이슈를 캐낼 준비를 한다. 그 이슈는 질 낮은 의혹으로 변질되어 영상으로 박제된다. 그러면 그 영상을 본 소비자들은 허락이라도 받은 마냥 해당 인물을 난도질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질 낮은 의혹은 그 어떤 해명도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실을 과거 '타진요'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질 낮은 의혹에 대한 해명은 어떤 방식으로 던 다시 질 낮은 의혹으로 이어지게 된다.
심지어, 로건 교관의 경우엔 없던 의혹까지 조작되어 부풀려지는 행태까지 이르게 된다. 지금까지는 사고가 나면 달려가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고의로 사고를 내버리는 행태까지 간 것이다. 이쯤 되면 진짜 누구 한 명을 죽이는 것이 상품이자 정의가 되어버린 듯하다.
이 끔찍한 사태는 결국 안타까운 희생을 치르고 가짜사나이의 모든 영상이 내려가고 나서야 종결이 되었다. 아니, 가짜사나이 이후 인기를 얻게 된 이근 대위는 여전히 끊이지 않는 의혹과 해명 요구 속에서 치열한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3. 결론. 혐오는 정의가 아니다
"한국인은 작은 일을 크게 만드는 걸 좋아해 X발"
가짜사나이를 내리겠다는 김계란의 공지글에서 볼 수 있던 댓글이었다. 가짜 사나이 1기에 참여했던 가브리엘이 한 말이라는데, 절대 이렇게까지 될 일이 아니었는데 사건이 커진 걸 보면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이다. 우선 한국인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문제는 미국 사회에서도 심각한 문제이다. 그리고 몇몇 아주 악질적인 가짜 뉴스 유포자들을 제외한다면 작은 일을 크게 키우겠다고 악플과 게시글을 단 것도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저 뒷담화 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몇 글자 끄적인 것뿐일 테니깐. 문제는 그 수가 수천수만 개의 단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수천수만 개의 뒷담화 같은 글을 당사자는 필터링도 없고 누가 쓴 것인지도 모른 채 적나라하게 마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수십만 수백만 단위의 시청자 군락이다. 그런 거대 집단 사이에서 어떤 방향으로 물타기를 하게 할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정의를 원하는가? 미안하지만 가짜사나이 콘텐츠와 출연진에게 우리가 한 행위는 정의가 아닌 혐오이자 폭력이다. 익명성과 표현의 자유를 앞세운 채 혐오를 휘두르는 행위를 나는 정의라 부르고 싶지 않다. 혐오를 휘두를 수 있는 껀덕지를 어떻게든 캐내어 음모론마냥 부풀려 확산하는 행위 또한 정의라 부르고 싶지 않다. 일개 유튜버들에게 가혹하리만큼의 도덕성과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혐오는 결코 정의가 될 수 없다.
문제점이 있다면 비판하는 게 당연하고 논란이 있다면 당연히 해명하고 사과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문제점과 논란을 대하는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유튜브 댓글은 상대방이 듣지 못하는 뒷담화가 아니다. 또한 이슈 유튜브 채널은 결코 뉴스가 될 수 없다.
논란에 대해 하나의 방향으로 속단하기에 우리는 많은 걸 알고 있지 않고, 우리가 가벼운 마음으로 적는 댓글은 생각보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가짜사나이는 그렇게 무너진 것이다. 쉽게 속단하지 말고, 쉽게 상처 주지 않는 세상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이번 일로 상처 받은 모든 사람에게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