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덕후와 힙찌리 사이
내가 주로 쓰는 '유튜브뮤직' 어플은 즐겨듣는 음악을 카테고리별로 나눠 플레이리스트로 만들어주는 기능이 있다. 2020년이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날, 유튜브 뮤직에 흥미로운 플레이리스트가 만들어졌다. '2020년 내가 가장 많이 들은 음악'. 이것이야말로 내 2020년의 정체성을 돌아볼 수 있은 리스트 아닌가. 2020년 나는 과연 어떤 인간이었나.
호기심을 가득 안은 채 플레이리스트를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나는 놀라운 리스트를 볼수 있었다. 리스트의 top10 정도를 말해보자면,
아이즈원, 힙합, 아이즈원, 힙합, 아이즈원, 힙합..... 놀랍게도 3, 4곡을 제외하면 top100의 모든 구성이 저 둘의 조합으로만 이루어져있었다. 그러니깐 나는 2020년에 사실상 아이즈원이랑 힙합만 들은 셈이 된다.
이 상당히 부조화스러운 나의 음악취향을 설명하려면 우선 십년도 더 전인 중학생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2007년 배치기 1집 '마이동풍'으로 시작한 힙합은 에픽하이 4집 'Remapping the human soul'이라는 앨범을 만나며 본격적으로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알기도 전에 느낀 고독이란 단어의 뜻" - 에픽하이 4집 'Remapping the human soul' 수록곡 '백야'의 첫가사
이 가사 하나로 설명이 끝나는 한국힙합면반 중 하나로 꼽히는 앨범. 힙합은 즐거울 일도 우울할 일도 많을 중학생 시절 나를 뒤흔들기 충분했다.
그 후로 내 작은 아이리버 mp3엔 힙합으로 가득찼다. 이른바 '언더그라운드'라 불리는, 대중음악과는 거리가 먼 아티스트들의 노래를 듣기위해 틈만 나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가리온, 피타입, 키비와 더콰이엇 등등. 남들이 듣지 않는 힙합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나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오직 힙합만이 나를 이해하고 위로했다고나 할까.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힙합을 좋아하는 중학생이라면 피할 수 없는 호칭이 있다. 바로 '힙찔이'. 힙합 이외의 음악은 음악 취급도 안하면서 힙합을 듣는 자신을 특별하다 생각하는 '힙합찌질이'의 준말이다. 그 호칭은 나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지겹도록 울어대는 발라드와 노래도 못하면서 예쁜 척 멋진 척이나 하는 아이돌 노래나 듣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10년 후. 그 힙찔이는 어느새 어엿한 걸그룹 아이즈원의 팬클럽 회원인 '위즈원'이 되어버렸다. 십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이돌 노래, 그것도 남들이 만들고 써준 노래를 앵무새처럼 따라 부르는, 춤이나 출 줄 알지 라이브도 못할게 뻔한, 가사에 의미도 라임도 없는 노래나 듣고 있다니! 라고 할려나. 나는 정말 몰랐다. 남들이 안 듣는 시커먼 힙합 음악만 찾아듣건 내가 아이돌 걸그룹 아이즈원의 씨디와 굿즈를 사 모으고, 음원 순위를 위해 스트리밍을 돌려놓은 채 직캠을 찾아보는 덕후가 될 줄은.
물론 10년 동안 힙합만 들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힙합에 대한 애정이 예전 같지 않다 하더라도 나의 음악 취향은 기본적으로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근까지도 1990년대 뉴욕힙합에 빠져 나스와 라킴, 우탱클랜을 찾아듣던 나니깐. 아이돌 음악, 그러니깐 케이팝은 유행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겨우겨우 따라 듣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랬던 내가 2019년 아이즈원의 '비올레타'를 듣고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우연히 보게 된 '비올레타'의 티져 영상. '장원영' (지금부터 나오는 이름은 모두 아이즈원의 멤버들이다.) 으로 시작해 김민주로 끝나는 티져 영상의 비쥬얼은 전에 본적 없는 것이었다. 트와이스, 레드벨벳 등 그 전에도 좋다고 생각했던 걸그룹은 있었지만, 그 티져영상은 특별했다.
그리고 그때 이미 위즈원이었던 동아리 후배가 최예나라는 멤버가 너무 귀엽다며 보내준 입덕 영상이 생각났다. 어떤 친구인지 한번 보기나 해보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수십개의 아이즈원 영상을 봐버린 상태였다. 자기 전에도 자고 난 후에도 아이즈원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무대 영상을 틀게 되는 몸이 되어 버렸다. 처음 느끼는 감정. 이제는 단순히 가수의 음악을 감상하는 수준의 선을 넘어버린, 한 그룹의 진짜 '팬'이 되어버렸다
힙합. 10년 째 함께 한 힙합은 여전히 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게 하는 유일한 음악이다. 늘 자기 하고 싶은 말은 어떻게든 다 하고 마는, 화도 많지만 눈물도 많은 녀석이다. 예전과는 비교가 안되게 많은 사람들이 듣는 음악이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진짜를 추구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멋진 친구이다.
아이즈원. 언제나 날 웃음짓게 만드는 그 이름.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 아이돌은 팬이 없다면 존재 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아이즈원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이즈원과 위즈원은 서로에게 서로가 완전한 관계이다. 아이즈원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음악 감상 이상의, 서로 완전한 관계를 함께 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의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을 위해 차에 시동을 걸고 유튜브뮤직을 튼다. 오늘 하루는 산뜻하고 여유롭게 기분으로 시작하고 싶다. 이런 날엔 아이즈원의 4번째 미니앨범 'One-reeler'의 수록곡이자 멤버 김채원이 작사 작곡한 노래인 '느린 여행'이다.
"길을 걷다 보면 어둠이 올 수도 시간에 쫒길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 소중한 이 순간을 아주 천천히 느껴봐요."
아이즈원과 함께 하는 이 순간. 이보다 더 행복한 출근길은 아마 없을 것 같다. 그 소중한 순간을 천천히 느껴본다.
출근길엔 아이즈원이었다면 퇴근길은 신나야 한다. 퇴근길엔 역시 다이나믹듀오의 '거품 안넘치게 따라줘'가 제일이다.
"오르락 내리락 우리 인생은 미끄럼틀. 그래도 뭐 어쩌겠어 another day another struggle.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게 나 살고싶어. 거품 적당히 눈 덮인 맥주처럼."
퇴근길에 이런 말을 해주는 친구는 역시 힙합뿐이다. 그러니 어찌 신나지 않을 수 있을까. 손을 좌우로 흔들며 다이나믹듀오 형들의 랩에 맞춰 신나게 따라불러본다.
힙합과 아이즈원.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플레이 리스트 속에서 오늘도 위안과 행복을 느낀다. 아무래도 2021 플레이리스트도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