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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ella Jul 15. 2024

240628

망한 플러팅 멘트 가르치는 학원이라도 있나

역대급으로 아무런 이슈가 없는 하루였다. 

아무런 일정도 없었고, 소죠르노도 신청했고, 해야 할 일도 없었고.....다만 일기를 써야 하는데 귀찮았다. 릴리와 살구가 일기를 내놓으라고 기분 좋은 재촉을 했지만 미루고 또 미뤘다. 글발이 오르지 않았을 때 쓰는 글은 어차피 재미가 없기 때문에, 이런 이유였다.

일어나서 느즈막히 햇반에다 고추장비빔밥을 해서 먹고 누워서 노닥노닥 쉬었다. 아, 마이리얼트립 고객센터와 한 판 했지. 마이리얼트립과 투어를 판매한 여행사에서 나를 가지고 빙빙 돌리길래 참다 못한 내가 폭발하고 말았다. 원래 나는 감정노동자들에게 굉장히 섬세하고 친절한 사람이다. 정말이다....서비스직 경력도 긴 나는 굳이 어디를 가서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굳이 따지자면 식사 후에 치우기 쉽도록 그릇을 여러 장 포개어 두고 자리를 뜨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하지만 상담사분은 매뉴얼대로 대답하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책임감없는 폭탄돌리기를 계속하는 회사들의 태도에 너무나 화가 났고, 내가 그것을 토로할 수 있는 곳이 고객센터뿐이었다. 나는 반말을 하지도, 욕설을 하거나 무례한 발언을 하지도 않았지만 기분이 상한 티가 여실히 났을 것이다. 그걸 숨기려는 척도 하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마이리얼트립 측의 입장은 간단했다.

'우린 아무 것도 도와줄 수 없으며 네가 직접 현지 여행사와 통화해서 해결을 봐라. 아무튼 우리 책임은 아닌 듯.'

그 과정에서 마이리얼트립의 상담사님은 어떻게든 문제를 내 과실로 돌리기 위한 듯한 발언을 계속 했다. 내가 취소 신청을 투어 날짜 이후에 했다며. (그 취소 신청은 상담사 연결을 위한 방법이었을 뿐이고 유선상으로 투어일 이전에 분명 일정 변경 신청을 했는데도...)

아무튼 잔뜩 상한 기분 외의 어떤 소득도 없는 채로 마이리얼트립과의 대치가 끝났고, 나는 정말이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현지 여행사에 다시 연락을 했다. 제발 도와달라고. 천만다행이게도 내 안타까운 사연이 현지 여행사의 상담 직원에게 닿았는지, 아니면 그가 임의로 처리해줄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건지. (아마 둘 다이지 않을까?)

그는 '선의로' 해 주는 행동임을 강조하며 내 투어 일정을 변경해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walkabout tour'!

이 블로그를 꾸준히 본 사람이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이탈리아에 도착한 이래로 나는 한 번도 집 밖으로 안 나갔던 날이 없었는데, 오늘에야말로 나가지 않는 날이 되려나? 생각했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저녁이 먹고 싶어져서 다시 채비를 했다. 일전에 정말 맛있다고 생각했던 식당에 갔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예약이 다 찼다고 한다. 다른 가게 중에선 가고싶은 곳이 없었다.

터덜터덜 나와 걷고있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어떤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든 나와 친해지고싶어하는 것 같았다. 반지를 들어 보이며 약혼자가 있다고 했더니, 그는 약혼자가 이탈리아에 있냐고 물었다. 이마를 탁! 이전에도 해외에 나갔을 때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더니 남자친구가 현지에 있느냐며, 한국에 있다고 했더니 그럼 문제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던 남자들이 두셋 있었다. 아니, 이런 멘트는 어디서 가서 배워오는 건가? 전혀 하나도 로맨틱하지도 기분이 좋지도 않은데. 나는 정말 외모지상주의를 혐오하는 사람인데, (※ 오로지 개인의 경험에 빗댄 말입니다) 대체로 소위 '잘생긴' 외모가 아닌 서양 남자들, 특히 나이든 백인남자들이 유난히 어린 동양인 여성에게 집적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잘생기지도 어리지도 않지만 자기가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상대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자신에게 잠자리를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남자들 말이다. 그리고 대체 약혼자나 남자친구가 여기 있는지 어디 있는지는 저들이 알 게 뭔가? 그는 내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고 하자 자기가 좋은 식당을 안다며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내가 미쳤는가, 낯선 남자를 뭘 믿고 따라가? 괜찮다고 완곡하게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길 건너편에 있는 페루 음식점에서 식사하고 가지 않겠냐며 점원 언니가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원래 케밥이나 사서 들어가려고 했는데 또 권유를 받으니 기왕 나온 김에 맛있는 걸 먹고 싶기도 했고, 페루 음식은 처음 접하는지라 신기하기도 했다.

감자튀김과 샐러드가 곁들여 나온 튀긴 닭가슴살을 먹었는데 제법 맛이 좋았다. 

식사를 하고 들어와서 방에 들어왔는데 문득 가슴 한 켠이 사무치게 시렸다.

처음으로 찾아온 외로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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