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의 저는 30여 년 전부터 우울이 시작되었어요. 극심한 사춘기를 보내기 전에는 친구도 거의 없고, 집과 학교, 공부만 하던 모범생이었지만 인정받고자 애를 썼던 때였어요. 초등학교 때는 그만그만한 공부 실력이었던 제가 중학교 반배정 고사를 보고 받은 8이라는 숫자가 저의 승부욕을 자극했죠. 반배정을 받던 날, 각자 반이 적힌 쪽지를 나눠주고 찾아가라 하셨는데 그 뒤에 '8'이 있었고, 저는 추리를 했죠. 여학생 반이 총 7개였는데 제가 맨 끝 밭이었고, 여학생 중 8등, 우리 반에서는 2등이라 생각한 거예요. '내가 우리 반 2등이라고?'라며 혼자 들떴어요. 집에 돌아와 화장실에서 빨래를 하고 계시던 엄마에게도 설레며 말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시큰둥했죠. 늘 엄마는 그런 편이셔서 익숙했지만, 무척 서운했던 기억이에요.
어떻게 해서든 잘한다는 말이 듣고 싶었어요. 꾀부릴 줄 모르고, 하라면 열심히 하던 아이였어요. 심지어 교회에서 내주는 숙제도 늘 혼자 해 가던, 조용하지만 의욕 넘치는 아이였어요. 하지만, 그게 함정이죠. 한다고 해도 조용하다 보니, 묻히기 쉽고, 인정도 맘에 차게 받지 못했어요. 다 제 탓으로 돌렸죠.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부족한 내 탓이라고요
그랬던 제게 2등이라는 숫자는 남달랐어요. 뭔가 해 볼만 하다는 신호 같았어요. 제가 2등은 맞았어요. 하지만 웬걸요. 1등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천재래요. 원래 공부를 하도 잘해서 소문났던 학생이고, 실제로도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어요. 저는 계속 2등... 아무도 모르는 2등요. 심지어 1학년 종업식 날 제가 우등상을 탔는데, 다들 놀랐어요. "쟤가 우등상을?" 2학년은 다른 반에서 1등을 노려보자 했어요. 하늘도 참 무심하죠. 2학년에도 그 1등 친구와 같은 반이 됐어요. 만년 2등의 설움에 어느 날 빛이 왔어요. 2학기 중간쯤에 도학력 고사가 있었는데, 제가 드디어, 드디어 1등을 한 거예요. 그 친구가 살짝 방심을 한 건지, 제가 꿈에도 그리던 1등요!!! 원래 담임선생님이 1등 하면 늘 반 아이들 전체에게 알려주셨어요. 이 날은 제게 오시더니, 저에게만 "이번 시험은 네가 1등이다. 잘했어." 이런 말씀은 크게 해 주셔도 되는데, 왜 굳이 제게만 전해 주시는지.. 힘이 쭉 빠졌어요. 어차피 해도 안 되는데, 나도 남들 앞에서 인정받고 싶은데 그리도 큰 욕심인 건지, 이 세상에 나 혼자인 것만 같았어요.
점점 공부 의욕도 줄어들고, 우울해졌어요. 해도 안 되는 거니까 포기하고, 무기력해졌죠. 친구도 거의 없던 터라 혼자 저 구석에서 찌그러져 가고 있었어요. 제 삶의 공식이 굳어져 가고 있을 때쯤, 중 3 국어 시간이었어요. 90년대 중반만 해도 여자 선생님의 쇼트커트 트는 파격 중의 파격이었던 때에, 국어 선생님이 그런 분이셨어요. 체구는 작지만, 당당하고, 숏컷트에 귀걸이와 의상은 큐빅 찬란의 화려 그 자체였죠. 선망의 대상같은 그분이 어느 날, 그 날짜의 번호를 호명해서 책을 읽으라고 하셨어요. 저는 예상했단 듯이 일어나 국어 책을 읽고 자리에 앉았어요. 갑자기 선생님이 놀라며, 말씀하셨어요.
"와, 너 목소리 되게 좋다. 나중에 아나운서 해도 되겠다!!!"
그리고는 수업을 이어 가셨죠. 제 마음속은 난리가 났어요.
'내 목소리가 좋다고? 아나운서 해도 되겠다고? 정말로?'
국어 선생님의 지나가는 이 한마디가 저를 살렸어요. 단지 이 말 한마디면 됐을 텐데. 제가 열심히 한 거 잘했다고 알아주시고, 놀라워해 주시면 되는 거였는데,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설움이 다 날아갔어요. 공부는 진작에 놨어요. 알아주지도 못하는데 더는 의욕이 생기질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 날부터 넘지 못할 벽의 아나운서를 꿈꾸게 됐어요. 고등학교 입학해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방송반 도전이랍니다. 물론, 낙방했지만요. 그 도전 후로 시 문학 동아리도 들고, 교지편집부도 되었어요. 고 3 때 상담사로 꿈을 정하고, 아나운서 비슷하게라도 한 건 없지만, 마음 한 켠에는 늘 그 장면이 있었어요. 라디오 DJ가 되어 사람들이 힐링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요. 미래를 시각화해서 만든 꿈 보드에도 떡하니 붙어있답니다.
중 3 국어 선생님의 한 마디를 들은 날로부터 25년 후. 저는 팟캐스터가 되었습니다.
저처럼, 누군가의 따듯한 한 마디가 필요한 분들께 전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 한 마디가 저의 삶을 바꿔 놓았듯, 저도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지지, 힘이 되리라 믿고 간직한 꿈을 용기 내어 살짝 펼쳤습니다. 한 순간도 잊지 않았던 그 꿈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