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부부로 산지, 15년이 넘어갑니다. 숱한 부부싸움이 있었지만, 점점 줄어드는 추세예요. 아이들이 커 가기도 하고, 서로의 기질과 바꿀 수 없는 태생적 느낌들을 아니까 분쟁이 적어지는 거겠죠.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어요. 스트레스가 여기저기서 쌓이다 보면, 집안일 사소한 것에서도 화산이 폭발합니다. 며칠 전에 저는 상담 일을 마치고 밤에 늦게 들어왔고, 아이들과 집안일을 여기저기 돌봤던 남편은 무척 지쳐 있었어요. 제가 일들이 많을 때는 집안 살림을 신경 못 쓰는 편이에요. 워낙에도 꼼꼼하고 깔끔한 편은 아닌지라 남편도 고맙게 익숙해져 있는데, 정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도저히 참지 못하는 날이 있어요. 이 날이 그런 날이었던 거죠. 냉장고에 유통기한 가까운 음식들이 몇 개 보이니까 버리게 될 것 같고, 신경도 안 쓰는 제가 무척이나 야속했나 봅니다. 저는 며칠 전에 마트 갔다가 할인한다고 들였던 음식들이라 억울한 면도 있었고요.
이 사소한 문제 하나로만 의견 조율이 되면 좋을 텐데... 꼭 방향은 묻힐 만 한대도 또 어김없이 나오는 옛날이야기들로 급 하강합니다. 언성의 끝은 높아지고, 얼굴은 점점 굳어지고, 아이들은 각자 방으로 향하죠. 부엌에서 남편과 저는 3시간 넘게 대치하며 이 긴긴 싸움을 마무리했습니다.
다음 날, 출근하며 걸려온 남편의 전화는 분명 화해 모드였으나, 결국 또 끝의 한 마디에서 도화선은 촉발되었죠. 다시 불은 붙었고, "너는? 나는?" 하며 골은 더 깊어졌어요. 남편은 남편대로 초강수를 두고, 저도 한치의 양보 없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상담을 앞두고 이런 상황이 생기면 저도 정말 속상해요. 마음 안정이 생명인데 어지러워진 상태로 상담할 수 없으니 마음을 가다듬고,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립니다. 다행히, 상담 장면에 임하면 모드 전환이 되니 집중하고 마쳤지만, 저의 미해결 과제로 마음은 어둡죠.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니 분위기 바로 냉랭함이 온 집안을 감쌉니다. 중 1 첫째는 부모님의 싸움 따위에 영향받지 않는 쿨한 편이고, 초 3 둘째 딸은 아직 눈치를 살피고, 화해하기를 전전긍긍하는 편이에요. 평소보다 자기 할 일도 잘하고,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톤을 올리고, 저에게 애교도 부립니다. 끝에 하는 말은 저보고 아빠랑 얼른 화해하라는 거죠. 저도 오늘은 힘이 없어 그냥 기다리자고만 했어요.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저희도 사람이니까 마음이 딱딱 무 자르듯 움직이지 않잖아요. 버텨내야 할 때도 있죠.
싸한 분위기로 하루가 지나가고, 저도 바쁜 하루를 보냈습니다. 중간중간 아이와 전화하며 해야 할 일을 챙기고, 마음도 보듬어줬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오후 상담을 마치고,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문자가 와 있어요. 뭔가 하고 봤더니 둘째 딸이 보낸 거예요. 쿠폰이 있어 뭐지? 하고 봤더니 자기가 하는 온라인 학습 프로그램에서 쌓인 포인트로 제게 선물을 보냈더라고요.
지난 어버이날에도 보내줘서 포인트도 많지 않은데 저랑, 남편에게 하나씩 보냈어요. 저는 꿀호떡, 남편은 딸기 우유를요. 혼자서 온라인 학습하고, 번호 찾아서 보냈나 봐요. 그리고, 그 아래, 메시지도 있었어요.
"엄마, 아빠랑 빨리 화해해, 알았지?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엄마를 위해서 이기도 하고, 잘 먹어~"
이거 읽는데 만감이 교차하네요. 둘째 딸은 난독증이 있어서 한글을 천천히 배우고 있어요. 이만큼 글자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기적이고 감사해요. 딸이 보내는 긴 메시지가 처음인데, 이런 내용이라니.. 미안하고, 기특하고, 지금 내 마음도 모르겠고, 엄마의 숙명이 참 무겁게도 느껴지고요. 그럼에도, 꿀 호떡을 보내준 딸이 한없이 고마웠어요...
이날 밤, 저와 같은 메시지를 받은 남편이 먼저 대화를 요청했어요. 밖에서 저녁을 먹다가 메시지 보고 울컥했대요. 그 마음이 동해서 저에게 한결 정리된 마음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죠. 또 긴 시간 끝에 마무리를 졌습니다. 딸의 적극적인 제스처 덕분에 이 싸움이 저희에게는 유의미한 정점이 됐어요. 노력할 건 해 보고, 인정할 건 하고, 묻을 건 묻고, 조율할 건 조율하고. 20년 가까이 살아도 계속 조율이 필요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