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 분담의 1원칙, 가시화
결혼하고 나서 다양한 부부싸움의 소재들이 있었지만, 아이 낳기 전 단연코 으뜸인 단골 부부싸움 소재는 가사노동 분담 문제였다. 사실 결혼 초 둘 다 직장일을 하면서 집안일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던 시절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 부부의 신혼집에는 한 명의 선배와 한 명의 후배, 그러니까 동거인들이 있었다. 여럿이 함께 살림을 꾸려갈 동안에는 그렇게 큰 싸움도 하지 않았고 가사노동 분담도 잘 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단 둘이 살게 되고 둘 다 매우 바쁜 직장 생활이 시작되고 난 뒤에 생겼다. 우리는 가사노동 분담을 둘러싸고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내가 무척 화가 났던 상황 중 가장 답답한 건 이런 것이다. 내가 요리를 했다면 설거지는 남편이 하고 남편이 요리를 하면 내가 설거지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요리하고 나면 남편이 계속 설거지를 미루고 쌓아두는 것이었다. 그러면 다음 끼니 식사 준비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 싫었으므로 설거지를 빨리 하라고 재촉하였다. 그는 언제나 알았다고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문제는 시점. 즉 당장 하는 게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언제나 그냥 둬라, 내가 할 거다, 라는 답이 돌아왔다. 단, 본인이 하고 싶을 때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 입장에서는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그냥 식사 후 바로 설거지를 하면 아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내 마음처럼 이루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면 언제나 귀결은 배틀이었다. 집안일을 누가 더 많이 하고 있는지를 둘러싼 배틀이 벌어졌다. 나는, 니가 이런 식으로 미루니 결국 내가 더 많은 집안일을 하고 있다고 화를 냈고 배우자는 결혼 전 약속한 대로 반반 나누어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몰아부치면서 싸움을 만드냐고 반박을 해 왔다. 이걸 누가 중간에서 관찰해 정확히 측정을 해 주었다면 아마도 눈에 보여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 쪽은 내가 더 많이 하고 있으니 이걸 더 하라고 요구하고 다른 쪽은 똑같이 반반하고 있으니 내가 하고 싶을 때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니 싸움은 끝없이 도돌이표를 그리고 있었다.
배우자에게 정말 화가 났던 한 가지 사건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어느 날 소래포구로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대하를 사 가지고 왔다. 남편은 더 맛있게 먹기 위해 베란다에 부루스타를 켜서 석쇠에 굽자고 제안했다. 나도 석쇠에 구워 먹는 대하가 얼마나 맛있을지 기대하며 흔쾌히 동의했다. 우리는 신혼답게 베란다에서 하하호호 웃으며 대하를 구워 먹었다. 다 먹었으니 정리를 해야 했다. 내가 다른 부엌 설거지를 하고 남편이 부루스타를 정리하고 석쇠를 닦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설거지를 마치고 난 뒤에도 남편은 계속 쉬고 있었다. 잠깐 더 쉰 게 아니고 베란다에 석쇠를 그대로 둔 채 다음 날까지 쉬었다. 베란다에서는 새우 냄새도 잘 빠지지 않았다. 나는 빨리 정리를 했으면 하는 마음에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하였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도 석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가 정말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이런 장면에서 못 참고 내가 해치워 버리는 것이 우리의 가사노동 분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고 더 이상 그렇게 상대방 몫의 집안일까지 해 치우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절대로 안 할 거야.”
나는 이번에는 끝까지 석쇠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 그럼 그가 설거지를 했냐고? 남편이 설거지를 하긴 했다. 언제 했느냐가 문제다. 그는 계속 미루다가 거의 몇 개월이 지나 다시 그 석쇠를 사용할 때쯤이 되어서 그 설거지를 했다.
이런 일을 겪으며 정말 설거지 땜에 이혼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던 나는 어떻게든 해결을 하고 싶었다. 우리는 이미 결혼 5년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계속 설거지 땜에 싸우며 살 수는 없었다. 설거지 때문에 싸운다는 건 거의 매일 싸운다는 뜻이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정말 우리가 가사노동을 반반 나누어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중간 점검도 필요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많은 집안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정말 누가 더 많이 집안일을 하고 있는지 한 번 체크를 해 보고 난 후 다시 집안일에 대한 재분배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종이 한 장을 냉장고에 붙여 놓고 표를 그렸다. 각자 집안일을 할 때마다 일의 종류와 시간을 적어 보기로 했다. 1주일쯤 적었을까. 답이 금방 나왔다. 결과는 8:2였다. 내가 80프로를, 남편이 20프로를 하고 있었다. 나의 완전한 압승인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억울함과 서러움, 몸과 마음의 고됨과 스트레스로 펑펑 울었다. 다행히 남편은 이런 줄 몰랐다며 진심으로 사과했고 더 많은 일들을 기꺼이 나누어 맡았다. 이 날을 계기로 우리의 집안일 분담은 한 단계 높은 층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하고픈 말은 집안일을 원만하게 분담하려는 모든 동거인이 있는 가족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분담해야 할 집안일들을 ‘눈에 보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부부 집안일 분담을 위한 첫째 원칙이 되었다. 우리가 불필요한 싸움을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집안일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이지도 않은 집안일을 어찌 분담한단 말인가? 지금 생각하면 당연할 정도인데 그땐 그걸 몰랐다. 최근 책을 읽다가 ‘보이는 일=가치’라는 대목을 발견했다. 그렇다. 집안일 배분을 위해서는 일단 그 일을 모두 ‘보이도록’ , 즉 가시화해야 했던 것이다.
남편으로 하여금 육아와 가사 노동에 일정 부분 책임을 지게 하려면 모두가 잠든 밤에 요정처럼 몰래 다니며 요술을 부린 듯 말끔하게 집안일을 처리하는 짓부터 당장 그만둬야 했다. 그리고 남편이 육아와 집안일에 능숙하기를 기대한다면 가정을 위해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눈에 보이게 만들고, 남편을 당당한 파트너로 대할 필요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순 없는 법이니 말이다.
- 《페어 플레이 프로젝트》 (이브 로드스키 지음, 김정희 옮김, 메이븐, 32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집안일을 눈에 보이게 함으로써 해결해 나간 부분도 있지만, ‘설거지 대첩’의 80프로를 해결해 준 일등 공신은 사실 식기세척기였다. 식기세척기를 산 후 남편은 식기세척기로 설거지를 그때그때 잘 해내게 되었다. 1년 여에 걸친 싸움을 식기세척기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니 약간의 허탈감이 있었을 정도다. ㅎㅎㅎ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식기세척기의 열렬한 신봉자이다. 결혼하는 부부들이 꼭 사야 하는 단 하나의 필수템을 물으면 내 대답은 언제나 식기세척기이다. 그리고 뒤에 한 마디 덧붙인다. 식기세척기가 부부싸움의 80프로를 해결해 주었고 이혼도 막아 주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