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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Mar 01. 2022

계산적인 결혼과 실패한 결혼식

페미니스트의 결혼 미션

나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계산적인 결혼을 했다. 이게 사랑하지도 않는데 결혼했다는 뜻은 아니다.


계산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이미 결혼 전에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비혼으로 살거나 혹여 결혼을 한다면 평등한 결혼과 부부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리라 결심했다.

페미니스트로서 그와 내가 평등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저울질 했다는 점에서 계산을 했다. 경험해 보지 않았어도 뻔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남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결혼과 동시에 가부장제의 굴레로 들어가는 것임을 직감했다. 안 그래도 기울어진 운동장. 결혼의 시작과 동시에 압도적인 기울기로 기울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10년째 그에게 ‘누나’였다. 나이도 많았고 심지어 같은 학교, 같은 학과 직속 선배였다. 함께 일 관계도 얽혀 있었는데 거기서의 지위도 내가 위였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가 나의 결론이었다. 남자가 우위를 점한 요소들이 있었고 내가 우위를 점한 요소들이 있었다. 관계 안에서 이 힘을 균등하게 만들어 가보고 싶었다. 나는 당시 열혈 페미니스트였다. 내 생각이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내 실천이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등하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내 입장에서 해볼만 했다.  남친에 대해, 나를, 내 의견과 내 삶을 존중할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래서 연애는 남친이 먼저 제안했지만 결혼은 내가 먼저 제안했다. 5년을 사귀고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이제 결혼하자고 했다. 당시 남친은 뒤늦게 군대를 다녀와 어디에도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고 아마 일자리든 생계든 집이든 자리 잡는 과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이 당장 결혼에 적당한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했을 것 같다. 그는 “꼭 지금 해야 돼?”라고 물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난 지금 아니면 아예 안 할 거야. 그래서 네가 안 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 찾아볼 거야.”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끌고갈 일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결혼의 굴레로 내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는데 내 계획을 갖고 가야 될 것 아닌가. 결국 남친도 결혼을 결심했다. 둘 만의 관계는 둘의 노력으로 어떻게든 만들어가 볼 만 했다.


이제 두 번째 계산에 돌입했다. 이번엔 ‘돈’ 계산이었다.

안 겪어 봐도 저절로 계산이 됐다. 두 가족이 얽히는 문제는 우리 둘만의 문제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돈 계산을 해 보았다. 내 생각엔 최대한 양가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결혼을 해야만 쓸데 없는(?) 간섭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연애를 5년 하면서도 부모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헤어질 지도 모르는데 뭘.’ 이었고 둘째는 알려서 굳이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양가의 도움은 최대한 적게 받기로 했다. 다행히 양가 모두 당시에 크게 우리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해 줄 여력이 그다지 없었다. 우리집은 같은 해에 남동생이 해외로 유학을 떠난 상황이었다. 아마도 큰 돈이 들어가고 있을 것이었다. 한편 나는 8년간 꾸준히 아르바이트와 일한 돈을 엄마께 드리고 일부를 용돈으로 받아 왔는데 부모님이 그 돈을 정말 잘 모았다가 2천만원을 주셔서 전세값에 보탰다. 남친도 역시 본인이 공익근무할 동안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2천만원을 들고 왔다. 그 돈을 합해 전세를 구했다.

나는 지금도 양가에서 집을 사 주지 않았던(혹은 못했던) 일을 너무 다행으로 생각한다. 덕분에 우리는 과도한 간섭으로부터 벗어난 결혼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행운이고 복이다. 집을 받았다면 그건 굴레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양가 부모로부터 독립된 결혼 생활이 가능했던 것이 우리가 평등한 부부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느낀다. 우리는 그 동안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키워준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렇게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로 키워진 것이 고맙기만 하다.


다음 문제는 결혼식이었다.

우리는 장시간의 토론 끝에 결혼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 형식이 뭐가 중요해? 그냥 혼인신고만 하자.” 둘이서는 쉽게 결론이 났는데 양가 부모님에게 들고 가자 난리가 났다. 남친이 부모를 설득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우리 집이 문제였다. “형식이 뭐가 중요해요? 둘이 잘 살면 되지. 그냥 혼인신고만 할게요.” 했다가 “야! 그 동안 뿌린 게 얼만데?” 곧장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부모님은 나를 불러 앉혀 놓고, 죄를 지은 것도, 문제가 있는 관계도 아니므로 결혼식은 무조건 해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하셨다. 남친에게도 전화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맞나? 기억 잘못 되었을 가능성 있음 주의) 암튼 대소동 끝에 이건 우리가 뜻을 굽히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축의금 얘기를 하실 때는 정말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드릴 수 없는 규모의 금액이었다.

아, 가부장제 결혼. 정말 쉽지 않다. 대신 부모님이 원해서 하는 결혼식이니 결혼 비용은 모두 내시고 수입도 모두 가져가시는 걸로 했다. ㅎㅎㅎ


우리는 이런 결혼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참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하며 비합리적인 일로 느껴졌다. 남들 다 한다는 결혼 사진도 안 찍었다. 그리고 한 번도 그거 안 찍었다고 후회한 적 없다. 사진이라도 안 찍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결혼식을 하겠다고 생각하니 페미니스트로서 용납이 안 되는 장면이 또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신부의 손을 잡고 입장해 신랑에게 넘겨주는 장면. 이건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는 짬뽕이었다. 왜 여자는 아버지 손에서 남편 손으로 넘겨져야 하는 대상인가? 여자고 남자고 각자 자기 인생사는 건데 왜 여자에게만 남자라는 보호자가 필요하단 말인가? 당시의 나는 이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자신있게 부모님에게 달려가 말씀드렸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남편에게넘겨지는 짐이 아니다, 따라서 아버지 손을 잡고 입장하지 않겠다, 우리는  순서 없이 동시 입장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어머니는  없다고 등짝 스매싱을 날렸고 아버지는 평생  날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진심으로 서운해 하셨다. , 미치겠다. 정말 결혼은 미친 짓이구나. 결혼제도는 정말 가부장제의 결정판이구나.  가부장제, 몹쓸 . 정말 곳곳에 많이도 장치를  놨구나.   걸어갈 때마다 뭐가 자꾸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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