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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Mar 11. 2022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며느리

살아남을 수 있을까

- 엄마, 엄마는 참 거절을 잘 하는 것 같아.

- 응? 뭐라고? 


시아버지 생신 식사 자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딸 아이가 말했다. 이번 생신에는 어머님 힘드시니 조금 편하게 식당에서 식사 자리를 갖자고 두 형제가 합의를 했고 이에 따라 시가로 가지 않고 시가 근처 한정식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오는 길이었다. 나는 한 번에 못 알아들었다. 아이는 아까 점심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대화를 재현했다.


- 수고했다. 어서 오거라. 앉아라.

- 어머님, 아버님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뵙네요. 하늘(아이 태명)아, 할머니, 할아버지께 인사드렸지? 오는 길에요...... 블라블라블라...


- 남자가 오른 쪽에 앉는 법이니 너희는 자리를 바꿔 앉도록 해.

- 아휴, 아버니임~ 요즘 그런 게 어딨어요? 그리고 저 지금 앉은 이 자리가 너무너무 좋은데요? 이쪽 이쪽 반찬 다 손에 잘 닿겠어요. 하하하. 저 그냥 여기 앉을께요. 네? 아버님! 저희 그냥 앉을께요? 괜찮죠? 


결국 우리는 그 자리에 앉아 식사를 마쳤다. 이 대화가 딸 아이에게는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결혼 초부터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며느리였다.


- 명절에 내려올 때는 서방 와이셔츠 깨끗이 싹 다려서 입혀 갖고 오는 거야. 깨끗하네.

- 에이, 어머님! 다림질은 저보다 ㅇㅇ씨가 더 잘 해요. 이거 직접 다리고 제 옷도 다려줬는데요?


결혼 초의 어느 명절, 먼 길 온 우리 부부를 앉으라 하고 간식을 꺼내 주시며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직도 초보 며느리는 그걸 못 맞춰 드리고는 속없게시리 속마음을 말하고 말았다. 나는 반응이 빠르고 머릿 속으로는 아직 생각이 다 안 끝났는데 말과 행동이 생각보다 먼저 튀어 나가는 성향이다. 말을 다 하고 나서야 아차, 했다. 처음 시가 방문 때도 어머님 계신 화장실 문을 불쑥 여는 실수를 하고선, “으악! 어머님! 왜 문을 안 잠그셨어요?” 했으니 내숭은 이미 글러버렸는지도 몰랐다.

조금 있다가 물을 마시고 설거지통에 컵을 넣어 두었는데 어머님이 나를 부르셨다.


- 컵을 썼으면 바로 씻어 얹어야지.

- 아, 어머님은 그렇게 하시는구나. 네, 제가 조금 있다 설거지할 때 같이 씻을께요.


으악, 또 말이 먼저 나갔다. 심지어 곧바로 설거지를 하지도 않고 좀 있다 한다고 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컵은 얼른 씻었다. 시어머님의 아들도 컵을 사용하고는 바로 씻어 얹어 놓았다.


명절의 대화는 다 이런 식이었다. 어머님, 아버님과 생각이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한 번쯤 맞춰 드려도 되건만, 고장난 나의 입은 언제나 나의 생각보다 한 발 빠르게 말을 뱉어 버린다. 이런 식의 대화를 1박 2일 동안 나누고서 명절 제사를 마치고 나의 본가로 가려고 준비 중이었다. 방에서 짐을 챙기고 있는데 마루에서 음식을 싸 주시면서 어머님이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 그래, 가면 사부인께 안부 전하고 근데, 저거저거저거, 한 마디도 안 져, 그냥. 나랑 한 번 붙으면 보통 아니겠어, 저거.

- 헤헤헤, 어머님, 저희 둘 다 조심해야겠어요. 


나란 인간, 내숭 따위, 입에 발린 말 따위 못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 날 깨달았다. 그리고 내 단점은 어쩔 수 없지만 어머님을 진심으로 대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나도 솔직하게 속마음을 다 말해 버려서인지, 솔직하게 속마음을 말씀하시는 어머님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내가 미워하고 바꾸고 싶어하는 대상을 헷갈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싸우면서 바꾸고자 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제도와 문화, 불평등한 세상이지 어머님이 아니다. 피해자끼리는 싸우는 게 아니다. 연대가 필요하다.

어머님은 한 세대 앞선 여성으로서 나보다 훨씬 더 강력한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어려움을 감내하며 살아오셨을 것이다. 어머니와 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니 어머님이 여성으로서 살아온 삶이 진심으로 궁금해졌고 어머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몇 번의 명절을 더 거치면서, 남자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큰집으로 출발하고 나면, 나는 어머님과 주로 식탁을 지키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님과는 어떻게 만나셨는지, 결혼 생활은 만족스러우셨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어머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다 어머님이 아버님 흉을 보시기라도 하면 이때닷, 내가 더 신나서 그녀의 아드님 흉을 보기도 했다. 또 우리 부부가 각자 일을 하고 함께 생활을 꾸리면서 어떻게 집안일을 함께 하며 행복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는지도 말씀드렸다. 어머님도 조금씩 나를 이해해 가시는 느낌을 받았다. 결혼 10년쯤 후였을까, 어머님이 지나가듯 말씀하셨다.

"나는 이렇게 살지만 젊은 너희는 너희 식대로 살아."


나는 제사를 지내고 나면 나의 본가로 가는데, 어머님은 명절에 친정에 못 가도 괜찮으신지 물었다. 그러면서 내년에는 제사 지내지 말고 어머님도 친정에 가시라고 말씀드렸다. 당시엔 그게 되냐고, 쓸데 없는 소리 한다 하셨지만, 몇 년 전 어느 명절엔가, 어머님은 당신도 친정에 다녀오셔야겠다고 길을 나서셨다.


나는 전통적인 며느리 역할을 다하는 며느리는 결코 아니다. 하루에 왔다 갔다 하기 쉽지 않은 거리에 살아서 물리적으로는 언제나 원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사실 내가 어머님과 잘 지낼 수 있는 데에는 그 거리감이 한 몫 한다는 걸 안다. 그 때문에 혹은 그 핑계로 ㅎㅎㅎ 제사에도 가지 않고 명절과 생신에만 겨우 왔다 갔다 한다. 그렇다고 돈을 엄청 잘 벌어서 용돈을 펑펑 드리는 것도 아니다. 며느리로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어머님의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공감하며 어머님을 안고 울어본 적도 있고 어머님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가 있다고 느낀다. 몇 번의 깊은 대화, 그리고 긴 시간 인연을 쌓으며 진심으로 서로를 아끼는 사이가 된 것 같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 다르다. 하지만 나는 같은 여성으로서 어머님과 깊은 연대감을 느낀다. 우리는 분명히 통하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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