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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 아모르 파티

by 아라

2017-2018년쯤 처음으로 니체를 읽었다.


맑스주의자인데 더 이상 그리 살기 어려운 것 같아

기대야 할 삶의 철학을 잃은 채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자,

그럭저럭 천성따라 즐겁게 살자,

행복하게 살자, 하던 날들이었다.

삶이 이게 다일까, 하는 날들이었다.


그 시점에 니체가 다가왔다.


나에게 다가왔던,

내가 맨 처음 꽂혔던,

사랑했던 단어는 2가지였다.


디오니소스(Das dionysische Ja).

아모르파티(Amor Fati).


위기는 없애야 할 게 아니라는 말이 좋았다.

감당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에 꽂혔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디오니소스처럼 긍정하라는 말이 좋았다.

'운명애'라는 말이 그렇게 좋았다.


나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었다.

그렇게 사랑해서 '나 자신을 넘어서는' 고급한 인간이 되고 싶어졌다.


오늘 아침,

갑자기 그 날이 떠올라 오래 전의 노트를 꺼내 다시 적어본다.


Werner Horvath, 2005.


모든 종류의 위기를 도대체가 반박으로, 없애버려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은 최고의 어리석음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삶에 대한 즐겁고 충일한 긍정 ······ 존재하는 것에서, 빼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없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비극의 탄생



인간에게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운명애다 :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거나, 필연적인 것을 단순히 감당하거나 하지 않고, ······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

-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삶의 저주받고 비난받던 면 또한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 철학의 숨겨진 역사, 철학이라는 위대한 이름의 심리가 내게 분명해졌다. '정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 ― 이것이 내게 진정한 가치척도가 되었다. ······ 세계를 있는 그대로 디오니소스적으로 긍정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 ― 이 철학은 영원한 회귀를 원한다 ― 동일한 것, 매듭의 동일한 논리와 비논리를 원한다. 한 철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 삶에 디오니소스적으로 마주 선다는 것 ―: 이것에 대한 내 정식은 운명애(Amor Fati)다.

- 프리드리히 니체, 《유고》KGW VIII 3 16(32), 재인용.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 ― 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 —그렇게 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아모르파티Amor-fati :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를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27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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