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
존경하는 마음, 팬심 같은 마음이 어우러져 늘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2박 3일의 장례 기간 동안 잠만 집에서 자고 장례식장에서 작은 일들을 도우며(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저 걸리적거리는 역할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머물렀다. 장례식장에는 천 명이 넘는 인원이 왔다 간 것 같았다. 자리가 없어 빈소에서 마지막 인사만 나누고 식사도 못한 채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뜻을 기억하며 추몰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아 모인 글도 많았고 장례 기간 중 추도식 자리도 만들어졌다.
그는 지금의 나의 일터를 만든 분이다.
나는 정말 특별한 일터에서 일한다. 이 곳에서는 어른들끼리 서로 별명을 부른다. 별명을 들었을 때 웃었다. 장미, 개나리, 포도, 딸기, 사슴, 공룡… 온갖 동식물의 이름들… 둘리, 포비, 엠보… 캐릭터의 향연…
- 이게 뭐야?
이 낯설고도 웃긴 별명을 서로 부르며 적응하게 되었는데 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놀라운 점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생각하니, 이 곳에는 만나면 나이부터 묻고 서열부터 정리하는 문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다. 형님, 동생하는 것을 ‘사교’로 생각하는 문화도 많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나이주의’로 말할 것 같으면, 너무나 일상적이라 의문을 품은 적도 없었다. 대체로 나이보다 어리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 억울했던 적은 있을 망정, 모르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면 곧 나이를 묻거나 답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 와서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각자의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정보였던 것도 같다. 나이를 알게 되면 존대하며 받들 것인지 조금은 편안하게 대해도 되는지 정할 수 있었다. 모두가 성인이고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나이는 존중을 ‘어느 정도’ 할 것인지를 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나이에 따라 어떻게 대할 것인지 내 태도를 처음 만남에서 딱 정해 놓아야 실수 없이 인간 관계를 할 수 있다 여겨온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왜 서로 나이부터 묻고 시작했을까. 왜 그리 나이가 중요했을까.
나 역시 이렇게 사회생활을 해 온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이 곳에는 그게 없었다. 나이와 직위를 묻지 않게 되자 나이와 직위로 사람을 보는 관점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변했었나 보다. 5년쯤 지난 어느 날이었나, 아이가 초등학교 1-2학년 때쯤 문득 '아, 나이에 관계 없이 친구가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이를 묻지 않게 되자 나이에 관계 없이 친구가 될 수 있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띠 동갑 위부터 띠 동갑 아래까지 친구가 생겼다. ‘이런 관계가 가능하다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아이가 친구가 되었다고 누구에게나 이런 친구가 생기는 건 아닐 거다. 같은 직장에 다닌다고 누구나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닐 거다. (이게 모든 사람과 똑같이 친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별명을 부르는 단순한 호칭의 변화가 친구의 범위가 조금씩 넓히는가 싶더니, 나를 둘러싼 관계망을 얼마나 변하게 했는지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만나는 세상 자체가 달라졌다. 그제서야 문득 한 번씩 이런 문화를 만들고 시작한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일까, 너무 궁금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곳에서는 어른이 어린이들에게도 평어를 쓰지만 어린이들도 어른에게 평어로 이야기한다. 이건 더욱 놀라웠다. 그냥 아예 상상이 안 되었다. 아이가 어른에게 평어를 쓴다고 할 때 대부분 눈살을 찌푸린다. 버릇없는 아이 만드는 거 아니냐, 아직는 어리지만 학교 가서 선생님한테도 반말하면 어떡하냐는 등의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내 경우,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이 혀짧은 소리로 배꼽인사하는 그 귀여운 장면을 못 볼 것 같단 아쉬움도 있었다. 긍정적인 측면이라면 선생님과 조금 더 친근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도?
아무튼 그렇다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일단 받아들였다.
아이는 10대 후반이 되면서 가끔 묻는 어린이집 시절의 기억에 대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 근데 엄마, 친구들 많이 가고 나면 내가 주로 OO(OO은 어린이집 6세, 7세 담임을 맡았던 남자 선생님의 별명이다)이랑 놀았거든. 백설공주 놀이했던 것만 생각나. 나무로 된 빨간 사과를 OO한테 주는 거야. "OO, 사과 먹을래?" 그러면 OO이 사과를 받아서 한 입 먹는 척해. 그러면 내가 "OO, 그거 독사과인데!" 하면서 놀려. 그러면 OO이 "깨꼬닥" 하고 죽는 척하면서 쓰러져. 그러면 내가 막 웃었거든.
이게 뭐가 재밌었을까, '참 재밌었겠다' 나는 영혼없이 말한다.
- 근데 엄마, 생각해 보면 OO 너무 대단해. 내가 그걸 한 번만 한 게 아니거든. 매일매일, 열 번 스무 번, 똑같은 걸 했거든? 근데 그걸 다 받아줬어.
아. 여기서 방심하고 있다가 울컥 했다.
그는 아이의 어린이집 선생님이었고 아이가 공동육아방과후에 다닐 때는 함께 아이를 보내는 동료인 부모였으며, 지금은 우리집도 그집도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동네를 떠나지 않고 이웃에 산다. 출퇴근길이나 집앞 마트 등에서 잠깐씩 만나면 아이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웃이다. 그는 아이와 노는 것을 즐기는 분이었다. 그가 아이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분은 아이와 놀아주는 게 아니고 진심으로 같이 노는구나.' 어렴품이 느꼈었는데 아이의 말을 통해 확신이 된다.
공동육아어린이집에는 아이들 낮잠 재워 놓고 선생님들이 회의하는 일명 '낮잠회의'가 자주 있었는데, 그는 회의 때 나오면 팔 저려하셨단 얘기도 종종 들었었다. 아이가 낮잠시간에 잠들기 힘들어하는 편이라, 선생님 이 종종 팔을 빌려 주셨는데 하도 꼭 붙들고 있어서 재우고 나오면 팔이 저렸다는 사연. 무사히 낮잠을 재우고 낮잠회의를 하고 있으면 금방 아이가 따라 나와 "OO, 회의해?" 해서 다들 허탈해 웃었다는 이야기.
이런 남자 어른이 있는 공동육아어린이집에서 생활하면서 늘, 이런 어린이집이 전국에 수십 개인데, 아이와 별명 부르고 평어 쓰자는 제안을 맨 처음 하신 분은 대체 누굴까? 이런 어린이집을 맨 처음 만든 사람은 대체 누굴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은 고등학생이었던 70년대에 유신반대 투쟁에 나섰다가 투옥되신 경험이 있다 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서울의 창신동(여기는 우리 아버지 고향이라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여기는 서울의 찢어지게 가난한 달동네였다) 등지에서 부모 모두 일터에 나가고 홀로 집에 남아 있는 아이들을 돌보려고 동네에 천막을 쳤다 했다(지금 이 곳은 법인의 부설 기관으로 현재는 '지역아동센터'가 되어 있다).
궁금했던 이유가 또 있다. 70-80년대, 나는 너무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나지 않지만, 거대담론의 시대였던 것으로 안다. 70년대에는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청년들이 거리로 나왔던 시대이고 80년대는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청년들이 거리로 나왔던 시대 아닌가. 그 시절에, 이 사회를 바꾸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거리로 나왔던 청년들 몇 명이 가난한 달동네에서 꼬맹이 아이들을 돌봤다고? 그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고 싶었는데 직접 여쭤 볼 기회도 없었다. 진작 물어볼 걸, 지금은 하늘나라로 떠나셔서 물어볼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그 분의 뜻을 다 모른다.
그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수준에서 짐작만 해 볼 뿐이다.
그 분은 큰 키를 아이들 눈에 맞추려고
늘 무릎을 땅에 대거나 쪼그리고 앉아 아이들을 마주보셨었다.
거대한 담론과 원대한 뜻을 품은 이들이 많은 시대에
작은 존재, 가려진 존재인 '아이들',
아이를 방치하고 일터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부모들이 안타까워했던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진짜 놀란 건 사실 그 부분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부자들은 세상에 많다. 그들 중 대부분은 아마 동정이나 시혜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와 함께 한 분들은 단지 작은 존재인 아이들을 그저 '돌볼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 분의 이야기는 대학 때 복수전공했던 '교육학'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깨끗한 백지와 같아서 좋은 교육을 통해 좋은 것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주류 교육관과는 너무 달랐다. 백지 상태인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교육을 통해 세상을,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백지 상태인 자신의 세상에 자신의 뜻대로 마음껏 그림을 그려갈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것이 어른이 할 일이고 교육이라고 했다.
이 세상을 끌고 갈 사람들은 아이들이라고 했다.
내가 닮고 싶은 것은,
이 작고 소중한 존재인 아이들에게서 큰 우주의 씨앗을 발견한 그의 눈이다.
작은 존재들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의 깊은 시선이다.
단순히 돌보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눈을 맞추고 대화하면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고 배울 것이 있음을 알아버린 그의 깊은 마음이다.
미래의 씨앗을 담지한 아이를 깊이 존중하는 진심어린 마음이다.
몇 년 전 어린이날에 그 분이 보내 주신 시가 있다.
내 작은 기도는
황근남
내 작은 기도 하나는
아이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을 할 수 있을 때
말하는 것
내 작은 기도 하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즐겁게 노는
아이들만의 꽃밭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 것
지금의 내가 소중하듯
아이들의 지금의 시간도
소중한 것임을 잊지 않는 것
세상에 이런 시선이 있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감탄을 하고선
정신차려 보니 이런 분들과 함께 이런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언제쯤이면 그 뜻을 다 헤아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매일 조금씩 걷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그 길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오늘도 나의 길을 걷는다.
※ 커버 이미지: pixabay, child 1592846-1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