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례행사였다
누구나 일 년에 한 번은 이사를 하고 전학을 한다고 믿었다. 10살이 되기 전까지는 정말 그렇게 믿고 살았다. 태어나 기억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던 대여섯 살 때부터 그때까지 매년 이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아빠의 발령 때문이라고 엄마는 말했지만 사실은 넉넉하지 않은 형편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이사는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다른 동네는 어떤 곳일지, 새로 이사 갈 집은 어떻게 다를지,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 적응해야 한다는 두려움보다는 호기심과 설렘이 더 컸다.
시곗바늘을 더 뒤로 돌린다. 10살 이전의 기억으로 간다. 희미하다. 어렴풋한 기억 속 선명한 것은 다녔던 학교의 이름이다. 유일한 나침반을 들고 기억 여행을 다시 시작한다.
"어~~ 엄마 문 열어 주세요~"
초록색 대문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마치 노래하듯 신이나 몇 번이고 부른다. '열려라 참깨'를 외치는 알리바바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또 기대하는 마음으로 엄마를 부른다. 엄마가 대문 앞까지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고 나를 안아준다.
유치원은 7살 때 다니는 거라고 엄마가 말했다. 6살인 나는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그랬다. 유치원에 갈 7살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다. 그 사이 초록색 대문 집을 떠나 길 건너의 파란 대문 집으로 이사를 했다. 건널목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동네 이름이 다른 곳이었다.
드디어 7살이 되었다. 유치원에 갈 수 있게 됐다. 엄마는 형편 상 유치원에 일찍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는지 동네에서 가장 크고 원복도 예쁜 유치원에 가자고 했다. 화려한 유치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집에 살던 친구를 쫓아 간 유치원이 잊히지 않아서이다. 허름한 건물 2층에 있는 작은 유치원이었지만 태어나 처음 만난 신세계였다. 그곳에서 얼굴이 하얗고 야리야리한 친구를 만났다. 단짝처럼 다니던 친구는 여름이 지나고 보이지 않았다. 그 친구가 병마와 싸우다 하늘나라로 갔다는 사실은 국민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소식을 듣고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정확히 하늘나라로 갔다는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ㅁ국민학교 앞이다. 30년 전의 학교 건물은 그대로이지만 동네는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 어렴풋한 기억을 쫓아 하굣길을 더듬는다. 유치원이 있었을 만한 건물을 짐작한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살던 집을 찾아본다. '응답하라 1988' 쌍문동의 골목을 닮았다. 골목은 살아있지만 옛집들은 사라졌다. 이 즈음 우리 집이 있었을 것 같은 곳에는 빌라가 들어섰다.
입학을 하고 한 달 즈음 지나 ㅅ국민학교로 전학을 했다. 국민학생이 된 데에 적응을 마치지 못한 채로 학교까지 옮긴 것이다. 어리바리하였다. 학교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 곳이었다. 갑자기 지켜야 할 것과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전학을 간 첫날에는 엄마를 옆에 앉히고 수업을 들었을 정도다.
다행스러운 것은 어리바리한 아이들이 나 말고도 아주 많았다는 점이다. 교실에서 제멋대로 울어버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말을 못 하여 옷에 큰일을 본 남자아이도 있었다. 국민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참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그때 불쑥 스쳤다. 어리바리하였지만 조숙했다.
엄마가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어리숙한 딸이 걱정이 된 모양이다. 엄마에게 달려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한다. 누가 울었고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고 나는 뭘 했고 어떤 애가 옷에 똥을 쌌다는 이야기를 숨도 쉬지 않고 쏟아낸다. 지나가던 중년의 아줌마는 '딸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냐'며 '좋겠다'라고 한다. 엄마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는다. 예쁘다.
서울의 동쪽에서 북동쪽으로 그리고 남서쪽으로 이사를 다녔다. 집값이 저렴하고 조금 더 큰 집을 찾아 엄마와 아빠는 이동했을 것이다. 그러다 서울을 조금 벗어났다. ㄱ역은 서울과 경기도가 맞닿은 부분 중 한 곳이다. ㅅ국민학교가 있는 ㄱ동에서 차로 10분 남짓인 또 다른 ㄱ동으로 이사했다. 세 번째 국민학교로의 전학도 물론 함께다. 더 이상 어리바리한 아이는 없었다. 전학은 익숙한 일인 듯 새로운 선생님과 학교에 적응을 하고 친구를 사귀었다.
라이벌도 생겼다. 3학년이 되어 사귄 s와 단짝이 되었다. s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니고 서로의 집에 자주 놀러 가며 방과 후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s도 나만큼이나 조숙한 아이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s는 공부를 잘했다. 시험에서 늘 나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았다. 친구지만 s를 이기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다. 한 번이라도 내가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늦은 밤까지 공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시험에서 s를 이기고 1등을 차지했다. s가 놀랐고 축하해 줬다. 그녀는 좋은 친구였다.
슈퍼와 채소 가게 등이 있는 골목을 지나면 살던 집이 나온다. 그때의 슈퍼와 가게가 사라진 골목은 구분이 되지 않아 헷갈린다. 주택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 골목의 모양도 바뀌었다. 결국 예전에 살던 집은 찾지 못한다. 어디 즈음이었는지 조차 알기 어렵다. 별 수 없이 ㄱ국민학교로 간다. 달라진 골목길이라 처음으로 지도 앱을 켜고 학교를 찾아간다.
ㄱ국민학교 앞은 조금 독특하다. 정문 앞 문구점이 삼각주처럼 자리하고 양 갈래로 길이 나 있다. 어디로 가나 그 길은 얼마 안 가 큰길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많은 것이 변한 ㄱ동네에서 안 변한 것은 오직 그뿐이다. 삼각주 같은 문구점 건물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운동회 준비를 하는지 학교 운동장이 시끌벅적하다. 엄마들은 교문 근처에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시선이 엄마들을 지나쳐 자연스레 돌부리로 넘어간다. 교문이 닫히면 지지대 역할을 하는 돌부리다.
돌부리에 걸린다. 운동장에 있는 선생님을 보고 달려가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손에 들고 있던 족발 접시가 엄지 손가락을 할퀴며 손에서 빠져나간다. 접시와 족발이 땅으로 떨어진다. 선생님들 앞에서 창피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당황스러움에 몸을 일으키는데 담임 선생님과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달려온다. 엄지 손가락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다.
족발 심부름 때문에 엄지 손가락을 세 바늘이나 꿰매었다. 흉터도 남았다. 족발을 사들고 방과 후에 학교를 다시 찾은 것은 선생님의 부탁이었다. 선생님들끼리 족구 시합을 한 후에 족발을 드시겠다며 사 오라고 했다. 방과 후 선생님이 학생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상식 밖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부탁을 받은 나는 오히려 좋기까지 했다.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재미있었고 아저씨였지만 훈남이었다. 그런 선생님의 부탁이니 싫을 리 없었다.
엄지 손가락의 흉터를 검지 손가락으로 스치며 그 날을 다시 떠올린다. 수 십 년 전의 일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 흉터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