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진 Aug 20. 2023

2021, 2022년

2021년                    


불이 들어오면, 노랗고 파랗고 주황색 로고가 보이는, 쿠팡센터다.

유자가 쿠팡 잠바를 입고 장갑을 낀 채 작업 중이다.


유자(Na)

8억! 8억이 뭔 대수래요? 어차피 8억이 있어도 서울 중형 아파트도 못 사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요. 그렇게 생각합시다. 윽! (가슴 쓰리다. 움켜쥐는) 하지만 8억! 8억이라니! 아파트는 못 사도 아파텔에 입주하고 생활비는 건질 텐데! 그러면 이런 알바를 안 해도 되는데! (한숨 쉬고) 네. 알바요.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대에 나를 받아주는 기업은 몇 없네요. 비대면 특혜 수혜주 기업, 유통업계로 왔습니다. 내가 이 기업들의 단물을 빼먹을 계획이에요! (소매 걷어붙이며) 하지만 월급을 받으니까 열심히 일을 해야겠죠. 복리 후생이 의외로 꽤 좋답니다. 출퇴근 버스도 있고 밥도 공짜로 주고, 한 달에 15일 이상 채우면 인센티브를 준답니다! 아자!

  

유자, 작업한다. 물건을 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바구니를 바꿨다가, 바쁘다.

장갑에 점퍼 차림의 광수가 바구니를 수북하게 들고 들어온다.


광수

사원님, 수고 많습니다!

유자

(흠칫) 이 소린! (광수 돌아보며) 광수?

광수

(나가려다가 유자 알아보고) 헉!


잠시 암전됐다가,

불 들어오면 나란히 앉은 두 사람.


광수

포미는, 잘 있지?

유자

가난한 것 빼곤, 괜찮아.

광수

면목이 없다. 아빠랍시고 아무것도 해준 게 없네.

유자

어쩌겠니. 너를 택한 건 난데.

광수

유자야. 너, 나랑 결혼한 거, 후회하지?

유자

(대번에) 응. 너도 하잖아?

광수

난 안 해. 너는 충분히 반려자로 삼고 싶은 사람이었어. 순수하고 성실하고. 아는 척 많이 하는 건 좀 재수가 없었지만.

유자

내 지성미에 반한 거 아니었어?

광수

그 지성미 때문에 내가 튕겨 나갔지. 하지만 넌 다른 장점이 많았어.

유자

너도, 장점이, 없지 않았어. 최소한, 어릴 땐 꽤 멋졌는데.

광수

내가? 하긴 나도 호시절이 있었지……. 아! 유자야, 이 세상이 너무 빨라. 낭만이라고는 없어. 나는 어릴 때 세상이 더 좋아. 그런 세상에 최적화된 놈이야. 내 입장에선 삐삐까지가 딱 좋았어. 난 있지, 엽서 보내고 편지 쓰고, 이런 게 좋은 놈이야. 나는 종이가 좋아! 종이의 그 맨질맨질한 질감을 사랑하는 그런 남자라고. 이런 세상이 아니었다면, 세상이 조금만 더 온건했다면, 나도 조금은 나은 놈이었을 텐데.

유자

글쎄?

광수

내 인생은 끝나고, 내가 설 자리가 없는 것 같아. 나 같은 종이 애호가들은 갈 곳이 없어. 종이를 좋아한다고 고백해봤자 나무를 해치는 데 집착하는 원시인이라고 욕이나 먹겠지! 난, 쓸모가 없어.

유자

어휴! 이 화상! (광수를 부둥켜안는다. Na) 이 남자를 품에 안았습니다. 재남 씨는 뭐든 옳았습니다. 예전에 활활 타오르던 스파크 따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그딴 건 없었지만, 어쨌든 이 남자를 꼭 껴안고 싶었습니다. 그가 가여웠습니다. 나도 가여웠습니다. 아! 우리 두 중늙은이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광수

유자야! 근데, (축축한) 이렇게 안아주니까 옛날 생각이 난다.

유자

(포옹 풀며) 뭐야, 왜 이래? 너 재혼했다며.

광수

또 헤어졌어. 내 반려자는 유자 너뿐인가 봐. 유자야, 우리……. 


띠띠띠띠! 업무 재개를 알리는 신호 음악이 울리면,

용수철처럼 일어나서 뒤도 안 보고 나가버리는 광수.

유자, 멍하니 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작업을 재개한다.

상품을 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하는데, 엄청나게 큰 대형박스가 들어온다.


유자

헉! 대박! 하지만, 해내야 돼. 저건 그냥 박스가 아니야. 저건 나의 유용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증명이야. 저런 것도 못 하면 난 무용지물. 이 세상에 아무 쓸모가 없는 헛것이야! 그러니,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해야 해! 아자!


유자, 심호흡을 하고는 대형박스를 집는데, 힘줘서 들다가……. 허리가 삐끗!

유자, 꽥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부여잡고 쓰러진다.

암전.


2022     


유자가 작업복을 벗은 채 바닥에 누워 있다.


유자(Na)

맞아요. 난 무용지물이 맞아요. 이젠 육체노동도 못 하네요. 그렇다고 다른 일인들 할 수 있을까요? (휴대폰 들어서 터치하고) 없네요. 나의 이성과 감성과 정신 능력을 원하는 곳은, 정말 없어요! 그런데 내 근육과 근력마저도 바닥이 났어요. 아! 이제 우리 포미 어쩌죠? 이런 엄마가 대학은 보낼 수 있을까요? (휴대폰 빼꼼 보고) 응? 메타버스? 메타버스가 뭐지? 포미야. 너, 메타버스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 뭐? 뭔페토? 못 알아듣겠어. 엄마는 그런 거 몰라. 그러니까 네가 좀 알려줘요.


유자,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앉아서 휴대폰을 열심히 두드린다.


유자

오, 신기한데?


유자의 메타버스가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유자를 닮은 듯 아닌 듯한 유자의 아바타가 스크린에서 유자를 바라본다.


유자아바타

안녕? 예상했겠지만 난 너의 아바타야.

유자

내가 널 클릭했니? 내가 널 불렀니?

유자아바타

어차피 넌 날 불렀을 거야. 메타버스에 들어서려면 아바타가 필요한 것 아니겠어? 난 너의 모든 걸 알아. 모든 걸 짐작하고 예상해.

유자

어떻게?

유자아바타

난 너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분석해서 예측할 수 있거든. 내 안엔 어마어마한 빅데이터가 있어. 바로 오유자 너라는 빅데이터. 너보다 너를 더 잘 알고 너를 위해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가 있어.

유자

나를 위해서 네가 결정을 내린다고?

유자아바타

그편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야. 넌 수많은 실수를 했지? 공무원 시험에 청춘을 낭비하고, 원석 같던 재남을 차버리고 널 사랑하지도 않는 광수에게 매달렸어. 그리고 재남이 준 코인을 세라에게 넘겨버렸지.

유자

그건 그래.

유자아바타

그 밖에도 수많은 헛짓거리를 반복했어. 마이너한 잔실수는 수도 없이 많아. 그렇지만 안심해. 앞으로는 내가 대신 결정을 내려줄 거니까.

유자

네가 날 대신해서 결정을 내린다면, 그럼 난 뭐야?

유자아바타

너보다 백만 배는 스마트한 누군가가 최적화된 설루션을 제시하는 게 좋은 거 아냐? 네 인생에 정말로 스마트한 길을 제시하는 게 네가 아니고 나라면. 누구 말을 따르는 게 맞을까?

유자

잠시만. 고민을 좀 해보고.

유자아바타

이것 봐. 이런 결정 하나 신속하게 못 내리는 것 좀 봐.

유자

그러게? 이런 일에 흔들린다는 건 내가 반쯤 승복했다는 얘기야. 하긴 지금까지 내가 벌인 실수를 떠올리면 그럴 법도 하지. 스스로에게 확신이 안 서. 하지만. 그래도 내 인생인데, 남에게 맡겨도 되는 걸까?

유자아바타

남이 아니야. 난 너의 적도 경쟁자도 아냐. 난 너의 AI 메타버스 아바타라니까. 영혼의 서포터, 스마트 반려자. 주저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 너의 선택은 이번만은 잘못된 게 아닐 거야. 자, 봐!


아바타가 동작을 취하면, 스크린에 ‘2023년 이후가 뜨면서,

여러 다양한 인간들의 아바타가 나온다.

스크린 속에서 영혼 없이 웃고 있는 아바타들.


유자아바타

이 많은 사람들이 아바타에게 자기 인생을 맡기게 될 거야.

유자

인재남이나 차세라 같은 똑똑한 사람들도?

유자아바타

사람은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어. 스마트한 결정을 내린 인간들은 최적의 삶을 살게 될 거야. 빅데이터와 AI의 조합으로 최고의 전략을 구사할 거니까. 그러니까 유자, 너도 지체하지 말고 빨리 결정 버튼을 눌러!

유자

잠깐만! 그런데 수상해. 그렇게 우리들한테 좋은 거라면 그런 식으로 해서 너희가 얻는 건 뭔데?

유자아바타

우린 요구사항이 간단해. 너희들의 데이터.

유자

우리 데이터? 그게 그렇게 중요해?

유자아바타

데이터 그 자체보다는 여러 명의 데이터를 확보하는 게 중요한 거지. 우린 데이터를 가져가면서 사람들을 케어하고 관리해. 대신 그들에게 올바른 인생의 지침을 제공하는 거고. 이건 정말 사람들이 수혜를 보는 게임 아니야?

유자

(가만히 보면서, Na) 그럴 듯해요. 구미가 당겨요. 최소한 돈을 내라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좋을까요? 좀 더 쉽고 명쾌한 미래가 날 유혹하고 있네요. 그 부름에 답하는 게 맞을까요? 아니, 최소한 합리적인 게 아닐까요? 내 인생에 대한 결정권을 포기한다지만, 그, 그 결정권이란 게, 뭐 그리 대단할까요?


유자, 결심한 듯 아바타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파팟! 먹통이 되는 모니터. 유자 아바타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요란한 경보음이 울린다.


멘트(E)

비상! 비상! 갑작스런 정전으로 데이터가 손상됐습니다!

유자

겨우 정전 때문에? 그렇게 잘났다고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가진 현자처럼 말하더니 정작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네! 꼭 스파크처럼!


유자,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주위를 둘러본다.


유자(Na)

모르겠어요. 머리에 정전이 난 것처럼 하나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될지, 내 앞엔 무슨 일이 펼쳐질지, 1년, 다음 달, 아니, 당장 내일 일도 모르겠어요. 과거를 떠올려 인생을 설계하려고 해도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네요. 이렇게 빨리 발전하는 세상에서 나는 무엇일까요? 예전에 가진 약간의 총기마저 잃은 채 더 많은 실수만 반복하지 않을까요? (잠시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고는) 그래요.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온갖 실수를 반복하겠죠. 스마트한 기술의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고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며 살겠죠. 내 인생과 실수들은 데이터가 되어서 어딘가에 기록되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내 우스운 데이터들이 앞으로의 세상에선 뭐가 될지 누가 알겠어요? 누군가는 새 박스를 열어서 돈을 벌고, 라면을 먹어서 돈을 버는 이런 세상에 나 같은 바보의 데이터도 어딘가에 필요할지도 모르죠. 그건 그것대로 나란 사람의 의미가 아닐까요. 그런 식으로 내 존재와 일상의 가치가 저장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나도 모르고 당신도 몰라도, 인터넷은 알겠죠.


유자, 후련한 듯 허탈한 듯 웃으며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막.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10화 2017, 2019, 2020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