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들어오면, 광수가 엎드려서 닌텐도 게임기로 게임을 한다.
유자가 빨랫감을 든 채 들어와 널브러진 광수를 노려보다가,
광수 위로 빨랫감을 확 던지듯 떨어뜨린다.
광수
(놀라서 노려보며) 야야!
유자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면 어쩌자고!
광수
야! 이게 다 공부야! 나는, 프로게이머가 될 거야.
유자
게이머? 우리 광수 씨, 게임이라도 잘해?
광수
열심히 하고 있잖아.
유자
30대에 프로게이머? 그 나이에? 될 거면 벌써 됐겠지. 1년 동안 하루 10시간씩 했잖아! 고시 공부도 그 정도는 안 해!
광수
너야말로 뭐든 건성으로 하고 진득하게 못 하니까 암것도 안 된 거야. 예전 회사 동료들, 지금 연봉이 7, 8천 한다면서? 근데 넌 뭐니? 그렇게 무전략으로 살면서 나한테 소리 지를 자격이나 있어?
유자
보기 싫어! 나가! 이 게임 폐인아!
광수
간다! 가! 누군 보기 좋은 줄 아나? (나가버린다.)
혼자 남은 유자, 화가 나서 가슴을 탕탕 치며 괴로워하다가,
유자
(컴퓨터 보고) 뭐야? 유튜브? 이건 또 뭐야? 자기 동영상을 올리는 거야? (잠시 들여다보는) 별 시답잖은 걸! 뭐가 이렇게 조잡하고 사적이지? 관종들! (생각) 이런 거 올리면 돈이 될까? (고민하지만) 아냐. 이런 자잘한 걸 대체 왜 올리지? 지들 인생 누가 궁금하다고?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온다.
유자
싼 것만 먹어서 식중독인가? (가슴 쓸어내리며 모니터 보는) 됐고, 이혼하자. 그래, 더 늦기 전에 저 새끼랑 갈라서는 거야.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야. 애가 없으니까! (하는데, 헛구역질) 윽! 뭐야? (계속 구역질) 가만! 나, 혹시, 혹시……!
유자, 공포에 휩싸여서 허공을 보면, 암전.
대형 화면에 아이폰이 나온다. 초창기 출시 버전.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스티브 잡스의 그림도 잠시 보인다.
무대 중앙에 유자가 누워 있다. 배가 언덕처럼 부풀어 올랐다.
세라가 쇼핑백을 흔들며 들어온다.
세라
내가 목숨 걸고 피임하랬지! 네 남편, 알바라도 하니?
유자
그나마 면접은 보러 다니네.
세라
그래야지. 배가 이렇게 불러서 알바가 쉽겠니? 배가 안 불러도 일자리가 없는데.
유자
너는 잘 지내고?
세라
나? 이번 남편은 나랑 잘 맞아. 우린 뭐랄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해. 그래서 관계가 평화적으로 유연하게 갈 수 있지. 그러니까 유자야, 결혼도 두 번쯤 해보니까 뭘 좀 알겠더라.
유자
(짜증) 잘난 체하러 온 거면 그냥 가!
세라
이 언니님이 선물을 주러 왔지롱! (쇼핑백에서 박스를 꺼내며) 짜짠!
유자
(받아서 보는) 웬 노트북? 어쩌라고?
세라
심심하잖아. 누워서 인터넷 하라고! 나 간다!
세라가 나가고, 박스를 열어서 보는 유자. 11인치 가량의 노트북이다.
유자(Na)
한동안 인터넷도 거의 안 했는데, 온라인에서는 문화가 초 단위로 바뀌나 봐요. 외국 사이트로 가자. 허핑턴 포스트? 버즈피드? (읽는) “25 ice creams that ENTPs will madly love.” “ENTP들이 미친 듯이 사랑할 25가지 아이스크림?” 참, 제목들이 예술이네요. (보다가) 다들 재미있게 사는군요. 나만 이렇게 방구석에서 늙다가, 아이 낳고, 내 아이는, 나 같은 인생을 살겠죠. 부모가 이 모양 이 꼴이니까. 아! 그 사이에 2008년이 되고, 맥북 에어가 나왔네요. 이 노트북보다 세 배는 비싸겠죠? 크롬? 구글이 이젠 브라우저까지 만드네요. 구글은 안 하는 게 없어. 재남 씨도 이 팀에 있나? 아니, 회사 나왔다던가? 재남 씨! 이제는 얼굴도 잘생겼던 것 같아. 아냐. 못생겼어. 최소한 내 스타일 아니었어. 그건 확실해. 그리고, 재남 씨, 성격이 사실 엄청 나빴을 거야. 보상심리 때문에 폭력을 썼을지도 몰라. 그래, 그래서, 내 몸이 그걸 알고, 그래서 거절한 거였어. 재남 씨는 남편으로 광수보다 나빴을 거야. 막 배를 발로 찼을지도 몰라! (배를 움켜쥐는) 윽! 상상만 했는데, 왜 아프지? (하는데) 어, 아니야, 이건, 그러니까…… 아악!
배가 홀쭉해진 유자가 덩그러니 앉아 노트북을 퀭하니 본다.
그때, 무대 밖에서 응애! 응애! 아기 우는 소리 들리고, 아기를 안아 든 광수가 당황스러워하면서 들어온다.
광수
얘는 왜 이렇게 심하게 울지? 뭐가 문제지?
유자, 어쩔 수 없이 아기를 받아 안고는 기저귀를 살핀다.
유자
쌌네. 기저귀 옆에 있어?
광수
응? (둘러보는) 기저귀?
유자
집에 오면서 사 온다고 했잖아.
광수
아참, 깜빡하고 못 샀네.
유자
(짜증 나는) 그것도 안 사고 뭐 했어! 일도 안 하면서!
광수
야! 너도 일 안 하잖아!
유자
(어이없는) 내가 지금 어떻게 일을 해!
유자가 안자 울음을 잠시 멈췄던 아기,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광수
에이! 그래, 일하러 간다! 가! (나가버린다.)
유자
가! 가서 그냥 돌아오지 마! (광수가 완전히 나가자) 아, 보기 싫어. (대충 수건으로 기저귀를 교체하며) 아가! 너도 참, 하필이면 우리한테서 태어났니? 세상에는 유복하고 자상한 부모가 별처럼 많은데, 무슨 비정한 확률의 농간으로 우리한테서 태어났니? 참, 안됐다. 아가! (흔들다가) 아기, 자니?
아기가 잠든 것 확인하고,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노트북을 본다.
유자
해봐야지! 어떻게든 해봐야지! 최대한 엄마 노릇 하도록 엄마도 기운 낼게. 엄마도 블로그 만들었으니까, 눈먼 님들이 거기 배너라도 찍어주면 좋겠다. 그치? 자, 보자. 어제 블로그 방문자 5명. 어, 댓글 달렸다. (읽는) 안녕하세요. 님 블로그의 좋은 글 읽고 기운 얻고 갑니다. 제 블로그도 방문해서 좋은 기운 전해주세요. 흑마늘이 제철입니다. (김이 샌다.) 썅!
유자, 짜증이 나서, 확 엎드린다.
유자(Na)
남들은 블로그 해서 돈을 긁어모은다는데, 나는 돈도 못 벌고 광고 부지나 제공하고 있어요. (버럭) 어떻게 니들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아니, 인터넷 네가 이럴 수 있어? 나는 컴퓨터 기본 역사부터 비롯해서 전화선으로 띠리리 연결하는 것에서부터 TCP/IP니 DNS니, HTML이니, 이런 것도 다 공부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인터넷이 뭔지도 모를 때, 인터넷의 초석이 세워지는 걸 다 지켜본 사람인데, 왜 단물은 엄한 사람들이 가져가고 나는 잡석처럼 버려진 거냐고!
유자, 손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쩔 줄 모르는데, 노트북에서 울리는 박수 소리와 환호성.
앵커(E)
(영어로) 이번에는 여러분이 궁금해하실 만한 분을 모시겠습니다.
유자
웬 영어? (다른 데 돌리려는데)
앵커(E)
(영어) 전직 구글 직원이자 벤처투자자…….
유자
구글?
앵커(E)
(영어) 스타트업 대표로 주목을 받는 분이시죠! 재남, 인, 제이슨 인입니다!
유자
재남? 인? (퍼뜩) 인재남!
유자가 놀라서 얼어붙으면, 모니터에 TED 무대가 펼쳐지고, 한 남자의 미끈한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인다.
유자
아, 안 돼! 나오지 마! (그러면서 곁눈으로 보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중앙에 서는, 너무나 시크한 인재남!
재남(영어)
안녕하세요. 제이슨 인, 인재남입니다.
점점 내리꽂는 유자의 운명, 반전의 기회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