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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Aug 20. 2023

2002년

2002년                    


유자가 정장을 입은 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상사가 등장한다. 몹시 침울한 표정이다.


상사

유자 씨, 자리를 옮겨야 할 거 같은데.

유자

왜 저죠? 인터넷 사이트를 기획하던 사람한테 갑자기 배너 광고 영업을 뛰라고 하면, 이건 나가라는 소리 아녜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제 업무 성과가 다른 직원들보다 낮은 게 아닌데.

상사

유자 씨 실적이 낮거나 유자 씨가 잘못이 아니야. 회사 사정으로 조직 개편을 한 거야. 유자 씨가 디자인이나 프로그래밍을 할 수는 없잖아. 이제 프로그래머랑 디자이너, 광고 영업이랑 인사팀만 남아야 해. (돌아선다)

유자

(거의 독백) 과장님도, 프로그램 못 짜시는데. (Na) 아! 하지만 과장님은 가족이 있는 워킹맘이니까 저보다 절박한 것 아니겠어요? 네, 양보해야죠. 홀몸이고 어린 내가 양보해야죠!     


유자, icq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icq 메시지가 먼저 온다.     


재남(icq)

일은 잘 되고 있어요?

유자(icq)

일해요?

재남(icq)

야근 중. 월드컵 때문에 한국 난리던데. 어때요?

유자(icq)

그런 것 같네요. 남들은 신나나 봐요.

재남(icq)

거긴 낮이죠? 근무 중에 톡해서 미안해요.

유자(icq)

거긴 괜찮아요? 여긴 닷컴 죄다 망했는데.

재남(icq)

닷컴이 아무리 망해도 사람들이 검색은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애드워즈를 도입한 게 효과가…….

유자(icq)

배너 광고가 통 안 팔려요. 광고를 어떻게 팔아야 하죠?

재남(icq)

많이 힘들어요?

유자(icq)

재남 씨가 부러워요. 능력이 되니까. 거긴 회사에 마사지실도 있고 밥도 엄청 맛있다면서요.

재남(icq)

저, 다음 달에 휴가예요. 유자 씨, 찾아가도 돼요?

유자(icq)

뭐, 그러세요.     


휴대폰을 든 재남이 바로 등장한다.     


유자

(놀란) 세상에! 벌써 왔어요?

재남

아, 네, 뭐.

유자

(영혼 없는) 어머나. 반가워요.     


사이.     


재남

(머뭇거리다가) 유, 유자 씨, 보, 보고 싶…….

유자

두 달 동안 전화기 붙들고 앉아서는 겨우 2건 성사시켰어요. 그나마 1건은 광고주가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든다고 클레임했구요.

재남

월급은 나오죠?

유자

차라리 월급이 안 나오면 당당하게 말할 텐데, 대표님이 이리저리 영업 뛴 걸로 받는 월급. 정말 가시방석이에요. 이게 무슨 닷컴이야? 어지간한 굴뚝 기업보다 더 고루하고 전근대적이에요.

재남

유자 씨 생각, 자주 했어요.

유자

재남 씨가 내 생각을 왜 해요? 무슨 권리로?

재남

미안해요. 그런 권리가 생기면 좋겠는데. 내가, 그 권리를 법적으로 얻을 길은 하나뿐인 것 같아요. (결심) 유자 씨. 같이, 미국에 갈래요?

유자

네?

재남

우리 회사, 구경시켜주고 싶어요. 회사 정말 좋아요. 대학교 같아요. 공짜로 다니고 밥도 주는 환상적인 캠퍼스. 유자 씨랑 방금 만든 핫도그랑 스콘, 같이 먹고 싶어요. 거기서는 유자 씨 영업 안 해도 돼요. 유자 씨한테 맞는 훨씬 신나고 창의적인 일 찾아봐요. 우리 함께.

유자

잠깐만요. (돌아서서, 방백) 저건 프러포즈지? 결혼하자고!     


재남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대로 서 있고,

세라가 불쑥 들어온다. 30대의 세라, 사모님 포스가 난다.     


세라

그 새끼가 또 지 엄마를 집에 부른 거 있지? 아니, 결혼했으면 출가외인이지 엄마는 왜 불러? 어우! 노친네가 집 해줬다고 자기 집인 줄 알아요! 그 집 안을 꽉 채운 건 누구 돈인데!

유자

니네 집 명의가 아직 시어머니 명의야?

세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떠도는 거지. (분한) 내가 반드시, 반드시 집을 사고 말지! 유자 넌, 절대 결혼하지 마라. 최소한, 니 명의 집은 가진 다음 하든가 말든가 해!

유자

남편은 괜찮다며?

세라

남편? 얼굴도 싫고 소리도 싫고 체취도 싫고, 아주 그냥 다 싫어.

유자

결혼이 그렇게 끔찍한 거야? 그러면, 결혼도 하기 전에 좀 별로인 사람은 혐오스러워지겠네?

세라

어우, 야야야, 그걸 말이라고! 재벌이나 되면 참고 살지, 처음부터 별로인 남자랑 살을 섞고 살아? 아악!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

유자

그지! 하, 하지만 장점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호감도가 바닥이었으니까 살면서 장점을 발견하면서 점점 오르게 되는?

세라

(하품 쩍) 아아암, 왜 이렇게 하암~ (잔다.)

유자

야! (흔들어 깨우려는) 그래도, 혹시 반대로, 좋아지지 않을까? (세게 흔드는) 나한테 중요한 문제라고! 삶의 지혜를 공유해 달라고!     


유자가 세라를 두드리지만, 코까지 골면서 깊이 잠든 세라.

유자, 잠시 생각한 뒤 재남을 돌아본다. 눈을 빛내는 재남.     


유자

재남 씨, 우린 참 좋은 친구예요. 그죠?

재남

유자 씨.

유자

날 진지하게 생각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내가 재남 씨의 기준에 부합할 사람인지 확신이 안 생겨요. 몇 달도 안 돼서 실망할 거예요.

재남

그렇지 않아요. 나한테 유자 씨는…….

유자

아뇨! 난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우린, 어울리지 않아요. (손을 들어 거리를 보이며) 이 정도, 우린 딱 이 정도가 좋을 거예요.

재남

유자 씨!

유자

재남 씨가 꼭, 행복하면 좋겠어요.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랑 함께.

재남

(잠시 멍했다가, 알겠다.) 그래도 icq는 보내도 되죠?     

재남, 유자를 간절하게 쳐다본 뒤, 어깨를 늘어뜨리며 나간다.     

유자

내가 잘한 거지? 이게 맞는 거지? (초조해서 자리를 뱅뱅 돌다가, Na) 미국 갈 걸 그랬나요? 하지만 재남씨는 이미 출국했어요. 아! 떠나보내고 나니 마음속에 후회가 몇 근이네요. 의외로 꽤나 설렜고, 수락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어요. 하지만, 두려웠어요. 사랑 없이 시작할 결혼이, 쫓기듯이 선택할 미래가, 그리고, 지금은 저렇게 눈을 밝히지만, 피곤하고 불만투성이인 나를 보며 재남 씨 눈 속에 타오르던 스파크가 사라지는 걸 보는 게, 두려웠어요. 아! 아무튼, 영업은 정말 못 하겠어요. 결국 회사는 관두고 백수가 됐어요. 백수가 지천에 널렸는데 나 하나 더한다고 티라도 나겠어요? 그리고, 나는 다 생각이 있어요.     


유자, 커다란 책들을 꺼내 벽돌처럼 벽을 쌓는다.     


유자(Na)

공무원뿐이에요. 재남 씨한테 살짝 흔들린 건 내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골수 문과인 나에게 확실한 길은 교사나 공무원뿐이에요. 난 교육도 안 맞아요. 그러니까, 공무원을 해야 해요. 열심히 하면 되겠죠! 아자!     

책으로 만들어진 벽 같은 공간으로 쏙 들어가는 유자.



유자는 과연 자기만의 길을 가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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