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놀이 폭죽이 터지는 가운데,
앵커(E)
2000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됐습니다. 밀레니엄 버그, Y2K 대란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컴퓨터 데이터들도 그대로 남았고, 핵폭탄도 발사되지 않았습니다!
직장인처럼 차려입은 유자가 들어온다.
유자(Na)
21세기가 시작되었네요. 이제 나도 나이를 먹는 건가요? 하지만, 괜찮아요. 난 직장이 있거든요. 힙한 동네에, 새끈한 빌딩. 그리고 닷컴 회사! 내가 바로 그 닷컴에서 일해요.
상사(여/30대)가 등장한다.
상사
유자 씨, 네이버에 제휴 관련 메일 보냈어?
유자
네이버요?
상사
응. 홈페이지 초록초록한 신생 회사 있지?
유자
그런 곳이랑 협업을 해도 우리한테 메리트가 있을까요?
상사
기술력 있는 창업주들이 만든 기업이니까 괜찮을 거야
유자
그래도, 현대나 대우 같은 대기업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상사
회의에서 좀 더 얘기하자. (가려는데)
유자
과장님, 저기 근데요. 저, 스톡옵션, 받을 수 있을까요? 한솔텔레콤 직원들, 스톡옵션으로 대박이 났다면서요?
상사
음……. 유자 씨가 우리 회사에 작년에 들어왔지?
유자
네.
상사
살짝 좀 급한 것 같은데. 그지? (나간다.)
유자
문과라고 무시하는 거야. 프로그래밍 못 한다고, 쳇! (털썩 앉는데, 분하다.) 아니, 프로그래밍도 중요하지만, 프로그래밍 아래에 깔린 개념이 더 중요한 거 아냐? 기술 철학! 기술 철학을 제대로 세우려면 모든 학문의 바탕인 인문학을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인문학을 이렇게 멸시해도 되냐고?
유자가 투덜거리는 동안, 인재남(남/20대)이 들어와 곁에 앉는다.
재남
안 되죠. 인문학적 통찰력은 언제나 필요하죠.
유자
내 말이! 통찰이 없는 기술 발전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라고요. 인터넷이 지금은 선하지만, 통제 불가능이 되면 어떡할까요?
재남
핵심을 찔렀네요. 중앙 권력의 부재가 안겨줄 수 있는 화두죠.
유자
그러니까요! (하다가, 문득) 그런데, 누구세요?
상사
(들어오면서) 아, 재남 씨 왔네! (유자 보고) 여긴, 인재남 씨. 우리랑 일하는 방위산업체 직원인데, 컨설팅할 게 있어서 내가 초빙했어. 유자 씨랑 인사했지?
재남
네.
상사
이 친구 실력이, 국내에선 톱이야.
유자
(형식적인) 아, 그래요.
재남
그렇습니다.
유자(Na)
저 남자, 완전 별로이지 않나요? 첫째, 젠체하는 목소리가 별로고, 둘째, 시선이 거만스러워요. 셋째, 어쩌면 저렇게 능청스럽게 나랑 티키타카를 했는지! 아주 그냥 종합적으로 별로예요!
그동안 재남 쪽 잠시 암전되는데,
불이 들어오면, 유자 앞에 떡하니 앉는 재남.
유자
으어억! 또 뭐죠?
재남
(샌드위치를 두 개 꺼내 유자와 자기 앞에 놓으며) 점심요.
유자
내가 왜, 재남 씨랑?
재남
제가 업무 얘기를 나누다가 슬쩍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유자 씨가 승낙하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여기 앉아 있는 겁니다.
유자
제가 언제요?
재남
어제 오후 1시 37분에요. icq로. 기록이 다 있을 거예요.
유자
(생각을 더듬다가, 방백) 아, icq! 실수였어. 이모티콘이 귀여워서 몇 번 날렸지. 하지만 아무한테나 이모티콘을 남발할 수가 없고, 받아주는 사람이 저 인간밖에 없어서.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재남
(샌드위치를 보이면서) 안 드세요?
유자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고) 약속은 약속이니까, 먹어야죠.
재남
본 메뉴 다음엔 디저트를 해야죠.
재남, 쿠키 상자를 수줍게 흔들지만, 유자는 무시하고,
유자의 휴대폰이 울린다. 조금은 작아진 폴더폰을 꺼내서 보는 유자.
유자
실례할게요. (휴대폰) 여보세요? (그대로 있다가, 벌떡) 아! 너!
재남
지금 몹시 긴장하시는군요.
유자
응? 아, 그래. 내가 이따 전화할게. 꼭 할게. (끊는다. 두근거린다.)
재남
긴장의 이유가 뭔지, 제가 추측해 볼까요?
유자
아뇨, 됐고요. (벌떡 일어나)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냐!
유자가 후다닥 나가버리고, 혼자 남겨지는 재남.
재남, 잠시 샌드위치를 먹지만, 테이블 위에 힘없이 내려놓는다.
재남
맛없다.
재남, 자기 것과 유자가 남긴 샌드위치를 다시 포장해 넣으면서,
재남
(독백) 누군가, 그리운 사람이 돌아왔나 봅니다. 멋진 사람이겠죠. 잘생기고, 과묵하면서도 때때로 던지는 말이 세련된,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미소를 가진 그런 사람. 부럽네요. 그런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을 텐데. 사람을 프로그래밍할 수는 없을까요? (잠시 생각)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힘들겠지요. 차라리, 우리 모두 기계라면 좋겠는데. 그러면 공평하기라도 할 텐데. (몸을 틀어서 컴퓨터 모니터를 본다.) 그나저나 세상이 요란합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닷컴이기만 하면 만나겠다는 투자자들이 줄을 섭니다. IPO를 앞둔 닷컴을 찾아 돈 가방을 들고 달려듭니다. 매출이니 수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미래에 대한 청사진만 주목받습니다. 일단 선점하라. 나를 각인시키라. Get Big Fast. 이 무리에 속해, 정상에서 돈 자랑을 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면, 그때는 유자 씨 같은 사람, 아니 훨씬 더 멋진 사람들이 돌아볼까요?
재남, 샌드위치를 들고는 터덜터덜 나간다.
재남을 외롭게 만든 유자, 누구를 만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