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 유자와 광수가 마주 앉아 있다.
광수
오늘은 내가 쏠게.
유자
응? 아냐. 괜찮아.
광수
야, 나도 염치가 있지.
유자
괜찮아. 내가 좋아서 그래. 너 아직 학교 졸업도 못 했잖아.
광수
(민망하다. 고개 숙이다가) 어, 너 전화 왔다.
유자
(휴대폰 보고) 괜찮아.
광수
받아 봐. 실례잖아.
유자
괜찮은데……. (하면서) 문자 왔네. (읽는) 아는 사람인데, 이번에 취직했다고.
광수
취직? 어디?
유자
구글이란 데.
광수
구글? 회사 이름이, 구글이야?
유자
응.
광수
이름이 신기하다. 무슨 굴착기 회사야?
유자
그런 회사가 있어. 미국 회사.
광수
그 사람은 누군데? 남친? 싸이엔 남친 얘기 없던데.
유자
나 싸이클럽 잘 안 해. 너무 오글거려.
광수
난 싸이 좋던데. (전화가 오면, 바로 받고) 어, 숙희야! (환한 미소) 진짜 오랜만이다. 얼굴 한 번 봐야지. 난 서울인데. 넌? 강릉? 아, 좋지. 강릉 여행 가고. 그래. 다음 주에 봐. (끊는다.)
유자
(싸늘하게 보다가) 숙희는 뭐, 여친인가?
광수
초딩 동창. 아이러브스쿨에서 봤어. 너, 아이러브스쿨도 안 하니?
유자
해봤어. 유행이니까. 모임에도 한 번 정도 나갔어.
광수
신기하지 않냐? 옛날 친구들 다 만날 수 있고.
유자
그래서, 그 10년 전 초딩 동창 숙희 씨 때문에 강릉까지 간다고?
광수
좋잖아. 이 기회에 구경도 하고. 겸사겸사.
유자
꼭 내 앞에서 그걸 말해야 해? 우리 단둘이 있는데?
광수
(잠시 유자 보고) 유자야. 우리가, 사귀는 거, 아니지?
유자
응? 아, 그게, 그러니까.
광수
나는, 너한테 사귀자고 한 적 없어. 내가 그랬었니?
유자
아니. 직접적으로는…….
광수
난 그냥, 동아리 친구인 데다 스케줄 되는 김에 만나는 건데. 내가 혹시 너한테 이상한 암시라도 준 건가?
유자
아. (상황을 정리) 아냐. 나도, 네가 근처에 왔다길래, 밥 먹을 사람도 없는데 야근해야 해서 만난 거고. 그뿐이야.
잠시 암전.
불이 들어오면, 유자와 상사가 잔뜩 취했다.
유자
눈치가 없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상사
어유, 답답해, 답답해.
유자
아니, 지금 나랑 사귀면, 나쁜 게 뭔데? 내가 써포트 해줄 수 있다고, 내가! 취직할 때까지! 아니, 취직하고, 결혼해도, 애 낳을 때까지는! 테헤란로의 미래가 내 어깨 위에 있다고!
상사
짝사랑은 됐고. 유자 씨, 재남 씨는 왜 안 만나?
유자
누구요? 아, 그, 구글러 재남 씨?
상사
재남 씨랑 잘 되가는 거 아니었어? 분위기로 보면 진행 중 같던데?
유자
아니거든요?
상사
아유, 이 사람아, 재남 씨 미국 가기 전에, 확 잡아!
유자
(질색하는) 절대 싫거든요!
상사
재남 씨 진짜 능력자야!
유자
상관없거든요? 나는요, 남자한테 기대 살고, 남자한테 선택되고, 그런 거 싫거든요? 나는, 내가 남자를 선택할 거예요. 꼭!
상사
선택? 누구? 그, 취준생? (답답) 그 사람은 네님이 싫다잖아!
유자
싫다고는 안 했거든요!
상사
아무튼 관심이 없는 거잖아! 유자 씨한테!
유자
하지만 나도 관심이 없다구요! 재남 씨한테!
상사
유자 씨야, 아직까지는 여자가 남자를 더 좋아하는 것보다 남자가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게 좋다고들 하더라고.
유자
어우! 올드해!
상사
올드해서 미안한데, 내가 만약에 유자 씨면, 나 절대 재남 씨 안 놓칠 거 같은데! 인생이 달린 문젠데 합리적으로 전략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너무 아까워서 그런다고!
유자
그렇게 아까우면 과장님이 대시해요! 연하고 좋네!
상사
내가 어떻게 해! 난 애 엄마잖아!
인재남이 들어온다.
재남
어, 치사하게 둘이서만 마신다.
유자
(놀라서) 에에? (상사 노려보는) 과장님! 언제 불렀어요?
상사
(술 깬 듯 바로 일어나서) 아, 애가 깼다네.
유자
과장님이 텔레파시라도 해요? 그걸 어케 알아요?
상사
알아. 엄만 알아. 분명히 지금쯤 깼어. 안녕! (후다닥 나간다.)
유자 따라서 나가려다 바닥에 주저앉으면, 재남이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유자
(마구 손 흔들며) 오지 마요. 오지 마!
재남
취했는데?
유자
취했어도 오지 마요. 내가 다 알아서 해요.
재남
유자 씨는, 내가 그렇게 싫어요?
유자
응? 아니, 아뇨, 꼭 그런 건 아닌데.
재남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나아질 건 아니겠죠?
유자
아.
재남
너무 해요.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니.
유자
아이, 그게, 재남 씨! 있죠, 우리, 우리한테는, 큰 문제가 있어요.
재남
무슨 문제요?
유자
우리 사이에는, 스파크가 없어요. 스파크가!
재남
네?
유자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애인이 되려면, 스파크가 있어야 하는데, 재남 씨를 볼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뭔가 파파팍 튀어야 하는데. 그런 건 처음 만났을 때 파팟, 일어났어야 하는데, 우린 아니에요. 그런 게 없다구요.
재남
그래요?
유자
재남 씨도, 없죠? 나한테, 못 느끼죠?
재남
난, 꽤 있는 거 같은데. 처음부터요.
유자
(잠시 난감하지만) 어쨌든, 나는 없다구요!
재남
그런데 그 스파크란 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유자
(뜨끔) 네?
재남
한순간 강렬하기는 해도, 길게 보면 덧없는 거 아닐까요?
유자
(잠시 취한 채로 생각) 어.
재남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고, 비합리적이고, 아주 잠깐 불타오른 뒤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사그라드는 거 아닐까요?
유자
아니, 만약에 그렇다고 해도! 아이, 암튼, 지금 나한테는 중요해요!
재남
그러니까, 나는, 아무튼 안 된다는 얘기네요?
유자
네. 안 돼요. 우린, 안 돼요.
재남
그래도, 지금 집에 데려다주는 건, 그건, 괜찮죠?
유자
그것도. 앙. 돼. (잠든다)
재남, 피식 웃고는 잠이 든 유자 살핀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간다. 나가는 동안, 암전되면서,
앵커(E)
21세기 최초의 대형 버블이 터졌습니다. 바로 닷컴 버블이요. 화려한 마케팅, 열띤 IPO를 백그라운드로 혜성처럼 등장했던 수많은 닷컴들이 사라졌습니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꿀 거라던 닷컴 기업들이 문을 닫고, 테헤란로에 불이 꺼지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래를 향한 신인류의 희망도 끝난 건가요?
닷컴 버블은 유자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