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translation)과 창작(creation)을 조합한 창작 번역(transcreation)은 문학 번역과는 다릅니다. 외국어로 쓰인 문학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문학 번역이고, 외국어로 쓰인 각종 텍스트를 도착어 사용자 문화에 맞게 창의적으로 가공해 번역하는 것이 창작 번역입니다. 이때, 텍스트 종류는 마케팅, 유머, 대중문화 등 다양합니다. 체감상 번역 회사(translation agency)들이 콘텐츠 크리에이터(contents creators)로 회사명을 바꾸기 시작하던 약 15년 전부터 이 용어도 흔해진 듯합니다.
창작 번역은 현지화(localization)와도 결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글로벌 기업이 영문 홈페이지를 전 세계 언어로 현지화할 때는 일반 번역을 하면서 제품, 서비스, 법규 적용, 수리 및 환불 등이 나라별로 다를 수 있어 개별 현지화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과 아시아에 다르게 적용되는 규정에 맞춰 홈페이지도 번역하게 되듯이요. 현지화를 창의적 번역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정보 전달'이 최우선이라 원문 핵심 정보는 변경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창작 번역은 작성자의 '의도'가 가장 중요하며 의도만 살릴 수 있다면 원문은 마음껏 바꿔도 됩니다.
내가 창작 번역을 정식으로 시작한 건 2013년 초입니다. 미국 기업과 계약을 맺고 현지화와 창작 번역 업무를 시작하면서 창작 번역 지침과 교육자료를 봤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넘기며 훑는 텍스트는 직관적으로 와서 꽂혀야 하죠. 내가 다루는 창작 번역은 크게 두 갈래, 유머와 대중문화입니다.
유머
만우절, 핼러윈 등 젊은 층이 좋아하는 기념일이나 행사 전후로 독특한 캐릭터가 여럿 등장하고 엉뚱한 서사와 모험을 사용자가 인터랙티브 하게 체험하는 기능을 미리 영문으로 제공받습니다. 대부분 영어 사용자만 공감하는 유머 코드로 가득합니다. 그러면 한글팀 탄뎀인 동료와 의논해 최대한 호환되는 유머 코드를 한국에서 찾습니다. 상황, 캐릭터, 속담, 관용구를 한국 상황에 맞게 비틀거나 가공합니다. 만우절 카피를 준비하며 척박한 사무실 유니버스를 꾸미고 빌런, 소심이 등 캐릭터를 한국형으로 바꾸고 사무실, 위계, 간식 문화도 추가하는 식입니다.
또 다른 유머 창작 번역은 연결 오류, 지연, 그 외 알림이나 공지를 틀에 박힌 오류 메시지 대신 참신한 문구로 바꾸는 경우입니다. 원문이 "인터넷 연결을 확인한 후 다시 해주세요" 문장과 10개의 추가 변주 문장이면, "흑, 먹이 다 떨어짐... 충전 고파요" 등 원문 느낌을 살려 때로는 '병맛' 때로는 '애교'를 담아 작성합니다. 평소에 가장 많이 쓰는 메신저 업데이트(카카오톡) 공지 사항, 최신 공개되는 게임 공지 등을 읽어보며 어떤 톤, 신조어, 트렌드가 젊은 층에 인기인지 감각을 익혀둡니다. 그래야 마감 빠듯한 초고속 창작 번역 모드에서도 쉽게 꺼내 활용할 수 있습니다.
대중문화
두 번째 자주 다루는 창작번역 부문은 대중문화와 서브컬처입니다. 예를 들어, 재미난 서사를 부여한 기능 소개 원문에 로미오와 줄리엣 대사가 활용됐다면 한글로는 이몽룡, 성춘향, 방자의 가상 대사로 작성해 봅니다. 기능 소개에 등장한 핫한 미국 시리즈물이 아직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최근 한국 시리즈물 중 적합한 걸 골라 해당 캐릭터, 스토리를 활용해 변주해 봅니다. 언어는 물론, 문화, 주 소비자층 문화도 항상 염두에 둡니다. 어쩌면 책을 영화화할 때 각본가가 필요하듯, 창작 번역도 각색 기법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서브컬처를 다룰 때는 나무위키를 참고해 팬픽, 특정 팬덤 문화를 익혀 둔 후 번역에 활용합니다.
이런 노력 때문에 창작 번역은 일반 번역보다 품이 더 듭니다. 내가 계약한 회사는 프리랜서가 본인이 투자한 시간을 기록해 영수증에 청구합니다. 각자의 양심에 맡기는 자율적인 방식이죠. 영어와 가까운 언어인 독일어나 네덜란드팀의 시간당 비용보다 아시아 언어 시간당 비용이 높게 책정됩니다. 독어는 직역해도 되는 경우가 많아 쉽다면 아시아 언어는 어순 고려, 의역, 창의성이 더 필요하므로 당연합니다.
창작 번역은 번역보다 오히려 마케팅 카피와 접점이 더 많습니다. 마케팅 카피처럼 창작 번역도 글자 수 제한, 운율, 직관적 표현 등의 요건을 만족하려 원문을 크게 바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멋진 마케팅 카피라도 우리말로 번역하면 원문 느낌을 살리지 못해 밋밋해지곤 하듯이, 내가 한 창작 번역이 맘에 들지 않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SNS 특성상 피드는 빠르게 업데이트되고 결국 휘발성 있는 글이 많아, 후회는 미루고 지금 닥친 마감을 처리하게 됩니다. 물론 창작 번역 덕분에 연금, 건강 보험료 고용주 분을 내주는 예술가연금공단에 가입할 수 있었기에, 늦게라도 이 분야에 발을 담근 건 다행입니다. 머지않아 AI가 창작 번역 일감을 싹쓸이해 갈지 모르지만요.
(커버 이미지: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