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계엄 사태 이틀 후 12월 5일 목요일 5시, 베를린 시국 집회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황망한 마음에 그저 모여서 뭐라도 해보자고 준비 없이 만났습니다. 하필 그날은 오후 3시 아이 피부과 진료, 6시 반 한글학교 운영위 회식이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해 보고자 아이와 학교에서 만나 택시로 이동해 진료를 본 후,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혼자 전철을 타고 브란덴부르크 문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5시 조금 넘어 집회에 합류해 함께 구호 외치고 자유 발언도 듣고 집회 종료 후 회식 장소로 달려갔습니다. 선약은 웬만하면 취소하지 않는 성격에, 집회는 꼭 가야 했던 그날의 나는 아마도 아드레날린 힘으로 이 불가능한 동선을 소화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탄핵 표결을 하루 앞두고 12월 13일 금요일 다시 베를린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2~3배 더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탄핵 플레이리스트 가사를 인쇄해 나눠주시는 분, 커피 나눠주시는 분, 방송국 카메라도 보입니다. 이번에는 응원봉도 여기저기 보입니다. 가족과 친구를 따라온 외국인, 독일인도 꽤 됩니다. 첫 집회는 혼자였지만, 이번에는 지인 여럿과 합류했습니다. 국회에서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란 기대에 차서 더 뜨겁게 노래했습니다. 많이 모일수록 자신감이 커집니다. 내가 행동해서 바꾼다(실행), 여럿이 행동하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실현) 자신감입니다.
자신감 vs 자존감
뇌과학자 이안 로버트슨은 "뉴 컨피던스" 마지막 장에서 '자신감은 세상을 바꾼다'며 마무리합니다. 언제부턴가 미디어에서는 자신감보다 자존감이 진실한 가치라고 강조합니다. 자신감 하면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주문을 거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침팬지 우두머리처럼요. 반면, 자존감은 자신을 존중하고 보다 본질적인 내면 가치인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존감 높은 사람은 일부러 뽐내거나 몸을 크게 해서 남들에게 알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안 로버트슨에 따르면 자존감은 '현재' 자기 가치를 인식하는 반면, 자신감은 행동을 강조해 '미래'에 영향을 줍니다. 할 수 있다는 실행 가능성(내가 행동),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실현 가능성(현실성 여부), 이 두 가지가 자신감 핵심입니다. 베를린에서도, 여의도에서도 내가 나서서 (정치를, 상황을) 바꾸겠다는 마음으로 한겨울에 모였던 게 아닐까요. 탄핵 가결로 작은 승리를 맛본 집단 자신감은 정치 효능감을 일깨워 다음 행동을 불러옵니다. 육아 책에서 아이에게 작은 성취감을 자주 맛보게 하라는 조언과 이치가 같죠. 조금씩 자신감을 쌓아가면 한두 번 실패하더라도 금방 회복할 수 있는 것처럼요.
집단 자신감
이안 로버트슨 책은 개인이 자신감을 활용해 성공하자는 자기 개발서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감을 개인이 아닌 집단에 적용하면 큰 시너지가 일어난다고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운동선수들의 팀워크, 팀의 자신감이 실제 경기 결과에 영향을 줍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시민과 축구 선수들 시너지가 놀라운 성과를 냈듯이요. 정치에서도 집단적 자신감은 구체적 성과물을 만듭니다. 여기 한 가지 다른 요소가 추가됩니다. 내 경우, 이번 단체 행동은 뭔가 숭고한 대의를 위해 나선다기보다, 이해당사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2월 3일 이후, 대다수 한국인처럼 나도 정치 과몰입 상태입니다. 해야 할 일, 써야 할 글, 밀린 집안일은 뒷전이고 뉴스를 새로 고침해 자주 봅니다. 주요 신문, 커뮤니티에 어떤 속보가 떴는지 확인하느라 휴대폰을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운동도, 산책도 뒤로 밀립니다. 비상계엄 후유증으로 시민들이 윤석열 개인에게 정신적 위자료 청구 소송을 한다고 합니다. 나도 참여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해외에서 소송까진 무린 것 같아 관둡니다. 계엄 후 독일 동포 사이트에 탄핵 집회 관련 정보 글이 연이어 올라왔습니다. 표결 불성립 이후 더 가열차게 정보글이 올라왔고 어느 사용자가 '해외에서 왜 시위를 하나요?'라고 묻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질문에 각자 행동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친절한 댓글이 우수수 달렸지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살자고 하는 일이라고요.
주권 행사 & 이익 수호
독일 시민권을 딴 동포도 있겠지만 나를 포함해 주변에는 영주권만 가지고 여전히 한국 시민으로 사는 동포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재외국민 투표권도 행사하며 자녀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한국 가족, 친구들과 실시간으로 연결돼 있고, 빠듯한 살림에도 자주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어 친지를 만나러 갑니다. 한국 정치와 경제는 해외 동포 일상에 직접 영향을 줍니다. 우선 한국과 경제 교류하는 업종 종사자가 많습니다. 나도 한글, 한국말 기술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이니 전반적으로 한국 경제력, 문화 파워가 세지면 장기적으로 내게 이익입니다. 또한, 몇 년 전부터 다시 한국에 국민연금도 내고 있습니다. 경제가 불안하니 환율 방어에 국민연금이 아이스크림처럼 녹고 있단 뉴스를 보면 분합니다. 내 이익이 달린 일이라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내 한국 주식은 한없이 아래로 곤두박질합니다. 국내건 국외건 한국말과 문화, 경제, 시민권으로 엮인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뭐라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요.
가속 노화
노년내과 전문의 정희원 교수는 계엄 이후 목소리를 낸 많은 유명인 중 한 사람입니다. 저속노화 식단과 운동을 홍보하며 열심히 유튜브 활동을 하셨는데, 하루아침에 온 국민을 초고속 노화로 빠트린 사람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당신이 그러고도 리더가 맞습니까?" 영상은 최고 조회수를 찍었고, 댓글에는 계엄 이후 가속 노화한다는 고백 글이 우수수 달립니다. 뻑뻑한 눈을 껌뻑이며 뉴스 정키처럼 속보를 찾아보는 이 생활을 이제 접고자 합니다. 추운 겨울 저녁, 약속과 약속 사이 짬을 내 1시간 탄핵 집회 참석하고 나면 분명히 에너지도 얻지만, 솔직히 그 에너지를 다른 데 쓰고 싶습니다. 집단 자신감으로 고비 하나는 넘겼지만, 이제는 우리 이익을 대변하라고 뽑은 국회의원, 정치인에게 좀 맡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어떤 이는 이런 다혈질 국민성, 즐거운 2030 집회 문화를 칭찬한다지만, 나는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이 뜨거운 에너지를 창조하고 생산하는 일에 쓰는 게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