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자로 유연하게 일하며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합니다. 외국에서는 응급 상황에 가족이나 친척의 도움에 기댈 수도 없는데, 독일 부족 직업군에 해당 사항 없는 내 직업으로도 어찌어찌 일과 가정이 굴러가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독일 예술가연금공단(KSK)이 없었더라면 아마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예술가연금공단(Künstlersozialkasse)
보통 자영업자가 자비로 의료보험 등 사회보장금을 납부하는 반면, 예술 언론계 종사 프리랜서를 위해 독일 예술가연금공단(Künstlersozialkasse)은 고용주 몫의 사회보장비를 대신 납부합니다. 일정치 못한 수입으로 안 그래도 불안한데, 나름 이 공단이 의료보험, 노령보험, 연금보험을 반이나 내주니 나는 나머지 반만 부담해서 큰 도움이 됩니다. KSK에 가입하려면 우선 전공 관련된 직종에서 일해야 하며, 예술 또는 언론 중 해당 분야를 선택한 후 좀 더 세분한 직업 카테고리를 택합니다. 나는 언론 범주 아래 번역가 카테고리에 해당합니다. 이때 일반 텍스트를 다루는 번역가는 자격이 없고, 창작 번역과 현지화, 글쓰기 등 창의적 요소가 들어가는 일을 한다고 증명해야 합니다. 증명 과정은 길고 고단합니다. 어느 회사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 의뢰받는지, 실제 영수증 내역에 어떻게 청구하는지, 온라인 또는 출판물로 발행한 증빙 자료도 제출해야 합니다. 독일 대부분 관청이 그렇듯, 이 공단도 세월아 내 월아 하며 서류 한 번 오고 갈 때마다 1, 2개월이 훅 지납니다. 이미 지난번 제출한 자료도 또 달라고 하면 군말 없이 또 줘야 합니다. 혹시 심사 기간 동안 내가 창작 번역일을 확 줄이고 예를 들어 기술 번역으로 돈을 벌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인합니다. 그래서 신청 후 최종 판단까지 최대 6개월 심사 기간이 있습니다.
영문학 전공자라 우선 업무 연관성은 통과입니다. SNS 관리 업무를 맡은 회사를 위해 젊은 예술가 발굴, 인터뷰 작성, 답변 편집과 글에 맞는 그래픽 선정 등 세부 업무도 창의성이 필요하다며 나는 자세히 KSK 신청서에 기재했습니다. 미국 문화에 맞는 영어 원문을 한국 독자에 맞게 현지화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창작 번역, 편집 번역을 활용하는지도 설명했습니다. 특히 대중문화, 유머 콘텐츠를 다룰 때 어떻게 창의적으로 현지화하는지 강조했습니다. 또 다른 창의적 일감인 마케팅과 카피라이팅도 자세히 제출했습니다. 독어 또는 영어로 된 제품, 서비스 홍보 텍스트를 임팩트 있고 운율도 맞춘 한글 홍보 문구로 현지화하는 일은 즐겁지만 노력 대비 보상이 적은 편이긴 합니다. 가성비 좋지 않은 일감이지만, KSK 가입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내 수입에서 일반 번역과 창의적 번역이 차지하는 비율도 알려줘야 합니다. 심사하는 사람들은 동종 업계 종사자이므로, 창의적 번역만으로는 생계가 어렵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나는 일반 번역 40%, 창의적 번역 60%라고 제출했습니다. 일단 KSK에서는 받아주고 나면, 가입자가 여전히 창의적 번역을 주로 하는지 딱히 확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KSK 혜택을 받으며 큰 욕심 없이 텍스트 인간으로 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아이 어릴 적 아프면 낮에 아이를 간호하고 밤에 밀린 일을 할 수 있었고, 집에서 하는 일이라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영양 간식도 챙겨줄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이에게 늘 엄마의 일을 강조합니다. 엄마 작업실에 들어와 방해하면 안 되는 시간대도 분명히 알려주고, 엄마가 어떤 툴로 무슨 작업을 하는지 직접 보여주며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제 중1인 딸이 2년 후 인턴 신청서를 열 군데 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전에도 종종 직업에 대해 물어오긴 했지만, 이제 곧 부실한 부모 인맥을 박박 끌어모아 신청서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공들여야 할 두 가지 인생 결정은 동반자 선택과 직업 선택 아닐까 싶습니다. 둘 다 아니다 싶으면 갈아타도 그만이지만, 그러기엔 특히 직업은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아깝긴 합니다. N잡러 시대에 웬 말이냐 하겠지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직업 한 가지에 매진하면 만족감과 (경제적) 안정감이 따라올 확률이 높으니 직업 가성비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일찌감치 본인을 잘 파악하면 좋은데 나는 우왕좌왕하다 뒤늦게 번역에 정착했습니다. 가성비 나쁘게 살아본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좋아하고 싫어했던 일감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기술 번역
문턱이 낮은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요가 많지만, 제대로 못 하면 표시가 바로 나기 때문에 다시 일감을 받지 못합니다. 진입장벽은 낮지만, 이과 마인드가 없다면 스스로 그리고 빠르게 탈출하는 분야입니다. 인하우스 특허 신청서 번역사로 일할 때 청소기와 냉장고 도면을 뚫어져라 보며 전자 기기 번역을 쏟아냈습니다. 당시는 한국 기업들이 특허 선점에 매달려 아주 미세한 수정이라도 일단 특허부터 신청하고 보던 업계 극성수기였습니다. 우리 사무소에는 삼성전자팀과 엘지전자팀이 있었고, 작은 개인 발명팀이 있었습니다. 특허 번역은 상주 번역가가 아니라면 혼자 하기에는 검색에 공이 많이 들어서 힘들 것 같습니다. AI에 물어보는 것도 시간은 드니까요. 나는 도면을 그린 그래픽 팀, 신청서를 한글로 작성한 엔지니어 책상으로 쪼르르 가서 궁금한 걸 바로 해결할 수 있었기에 그나마 버텼던 것 같습니다. 물리적 실체가 있는 제품 번역은 괜찮지만, 통신 부문은 추상적이고 난해했습니다. 번역계 물리학 아닌가 싶습니다. 기술 부문 독한 번역사 풀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내가 거절한 일이 몇 번 돌아 다시 내게 오기도 합니다. 이제는 미련 없이 바로 지인에게 토스하는 분야입니다.
준법 감시
2008년 정도부터 한국에 지사, 공장, 매장 등을 둔 기업 준법 감시 위반 신고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고 수익도 높은 분야입니다.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일하지 않은 달(신고 사례가 없는 달)에도 기본급이 들어옵니다. 대신 내 컴퓨터를 6개월에 한 번씩 검증받아야 합니다. 컴퓨터가 건강한지, 최대 보안을 유지하는지 등을 확인합니다. 처음 준법 감시를 시작했을 때는 신문 기사에 날 만한 심각한 내용이 주였지만, 직장 내 민주화와 인권 감수성이 높아지며 이제는 경계가 불분명한 사안도 많습니다. 물론 모든 사건은 상세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객관적으로 번역합니다. 신고 후 기업 측 답장, 신고자와 추가 소통도 이루어집니다. 어떤 텍스트는 여러 명이 연루된 복잡한 사건을 주어 없이, 특히 한국어 특성상 성별 없이 쓰기 때문에 암호 해독에 애를 먹기도 합니다. 업계 용어, 비속어, 줄임말도 검색합니다. 완전히 해소되지 않으면 번역자 메모난에 꼼꼼하게 적어 기업에 전달합니다. 건조하고 객관적으로 처리한다고 해도 나도 노동자라, 마음으론 피고용자가 결론을 잘 수용하고 계속 건강하게 일하길 바라는 마음이 스며들기도 합니다.
SNS 관리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며 바로 시작한 일입니다. 미국 마이크로 블로그 플랫폼과 계약을 맺고 온갖 업데이트, 새 기능 소개, 사용자 인터뷰, 베타 버전 테스트 등을 다른 한국인 검수자와 탄뎀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글 팀은 기싸움 없이 협업이 매우 잘 됩니다. 번역, 현지화, 창작번역, 버그 신고 등 QA까지 두루 하면서 18개 언어 팀원과 온 오프라인에서 만납니다. 10년을 동고동락하다 보니 몇 명은 동료이자 친구가 됐습니다. 이렇게 번역가끼리 만나는 자리가 없다면 번역 자영업자 인생은 좀 삭막했을 듯합니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우리 플랫폼을 이용해 성 착취물이 기승을 부려 매일 불법 콘텐츠를 일일이 검수하며 후유증을 앓기도 했습니다.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이 개입해야 하는 영역은 있습니다. 인기 많은 AI 툴도 소위 제삼세계 문자 노동자들이 가혹한 성 착취물, 자해, 고어 콘텐츠 등을 걸러주는 덕분에 우리가 깨끗해진 결과물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검토자들은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을 앓는다고 합니다. 슬프지만 내가 입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모든' 형태의 착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통역
순발력이 필요한 통역엔 약하다는 걸 일찌감치 알았습니다. 나는 문자를 붙들고 씨름하거나 내가 쓴 글을 여러 번 고치는 작업을 좋아합니다. 통역은 휘발성이 있어 실수해도 순간 창피하고 말 뿐이지만, 번역이 남긴 디지털 발자국은 반영구적입니다. 물론 내 이름이 표시되지는 않아도 가끔 검색하다 내가 쓴 이상한 문장을 마주하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너무나 급하다는 업체 말에 못 이겨 이혼 법정 통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합의된 이혼이며 공증까지 받았으니, 법정에서는 형식적 절차만 한다고 했습니다. 독일 이혼 법정 판사 질문을 검색해 미리 읽어가긴 했지만, 그날 판사는 속사포로 말했기에 나는 중간중간 변호사에게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거 맞냐고 확인해야 했습니다. 양측 소득 기반으로 산출하는 법정 비용을 말할 때도 난 변호사석으로 가서 숫자를 보며 통역했습니다. 큰 무리 없이 끝나긴 했어도, 역시 나는 귀보다는 눈이 편한 느릿한 문자 인간이란 사실을 재차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