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베를린에 외국인 부모를 가진 아이가 많다고 해도, 우리 아이는 엄연히 '백인'이 주류인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생활 첫 발을 내디딘 어린이집부터, 권위를 가진 선생님 인적 구성은 '전형적 독일계'가 절대다수며, 학생 구성도 유럽계가 주류입니다. 베를린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남서쪽은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엄마를 닮은 외모, 연한 갈색 피부를 가진 아이가 '주류'가 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금요일 오후 한글학교입니다. 금요일 이른 오후 독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볍게 점심을 먹고 한글학교에 가기 위해 시내로 갑니다. 좀 미리 나가서 아이가 좋아하는 문구점이나 생활 잡화점 화장품 코너를 둘러보기도 하고 여름에는 버블티를 마십니다.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오후, 한글학교를 즐거운 이벤트로 만들고 싶어 시작한 시내 나들이 의식입니다. 이제는 내가 애쓸 필요 없이 아이도 한글학교를 매우 좋아합니다. 오히려 독일학교 친구 생일 파티 시간과 겹쳐서 한글학교에 결석하면 아이는 아쉬워합니다. 1주일에 한 번, 그것도 맘 편한 주말 시작을 알리는 금요일 오후에 나와 아이는 마음껏 '주류'가 됩니다.
매주 금요일, 주류가 되다
원래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엄마 말고도 한국어 쓰는 사람들과 교류하면 좋겠다 싶었죠. 베를린에는 한인 성당, 절, 명상 센터, 그리고 교회 여러 곳이 있어서 종교에 관심 있다면 한국 가정과 쉽게 교류할 수 있습니다. 딱히 종교가 없는 우리는 자연스레 한글학교를 택했습니다. 문자 배우기를 시작하면 아이가 어려워할까 봐 독일 초등학교에 먼저 적응해 1학년 1학기 끝날 무렵 한글학교에 등록했습니다. 독어 알파벳을 학교에서 배웠고 독어로 더듬더듬 읽고 쓸 줄 아는 상태에서 한글을 시작하는 게 낫다 싶었죠.
그렇게 시작하자마자 안타깝게 코로나 국면으로 한글학교는 온라인 수업으로 바뀌고 아이는 금요일마다 노트북 앞에 앉아 딴청을 피웠습니다. 최장 휴학 기간 6개월을 꽉 채워 쉬고 난 뒤 온라인 한글학교를 다시 시작했지만, 아이는 흥미 붙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대면 수업으로 바뀌면서 신나 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몸으로 부딪치고 반 친구들과 놀 수 있어야 재미있나 봅니다. 한글 공부가 주된 목적이라기보다, 한국어 환경에서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에 둘러싸여 상호작용하는 게 더 중요하니 대면 수업 전환이 반가웠습니다. 지식 전달은 언제든 가능해도, 독일 사회와는 미묘하게 다른 한국인 상호작용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아 체감하는 건 어릴 때 경험해야 더 자연스레 녹아들겠죠. 예를 들어, 선생님, 학부모끼리 마주치면 목례, 미소 또는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독일인끼리는 안 그러죠)을 보며 자라는 거죠.
아이가 다섯 살 때, 금발 머리로 딴 가발 겸 머리띠를 아이가 사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겨울왕국 엘사를 좋아하니 그러려니 넘겨도 좋았으련만, 왠지 파란 눈에 금발(은발)을 이상적 미인으로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했죠. 유치원에서 인기 많은 여자애가 '우연'하게 금발에 파란 눈이라 노파심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독일 아이들은 크면서 눈과 머리색이 짙게 바뀌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 내 딸이 일주일에 한 번은 비슷한 외모를 한 아이들, 선생님, 학부모를 접하며 '주류'가 되는 경험이 삶에 녹아들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안착한 금요일 루틴이 성장기에 좋은 자양분이 되길 바랍니다.
아이만 한글학교를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아이가 수업하는 동안, 나도 2시간 반 정도 학부모 대기실에서 나누는 이런저런 수다가 기다려집니다. 혼자 집에서 일하다 1주일에 한 번은 여럿이 모인 곳에서 모국어 수다를 하면 기 빨리기보다 채워지는 느낌입니다. 독일학교 학부모 모임이 지금도 싫은 것과는 다르게 말이죠. 처음 한글학교 학부모 대기실에서는 아는 사람도 없고 왠지 어색해서 쭈뼛거렸지만, 야금야금 얼굴과 이름을 튼 학부모가 많아지며 편안해졌습니다. 귀한 깻잎 종자를 선뜻 나눠주시는 분도 있고, 한국 책과 옷을 통 크게 나눔 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듭니다.
파김치 되는 날
아이가 좋아한다고 해도 학교를 두 개나 다녀온 금요일 저녁, 집에 도착하면 아이는 파김치가 되긴 합니다. 수업 끝난 저녁 7시, 지하철을 타고 한 번 전철로 환승해 기차역에 내린 후 다시 버스로 갈아타 집에 도착하면 8시가 훌쩍 넘습니다. 몸은 고단하지만, 아이가 더는 올라갈 반이 없을 때까지 다니다 졸업하면 좋겠습니다.
한 주 마무리를 한글학교와 함께하면 그 탄력을 받아 주말에 내게 한국어로 대답하는 빈도가 슬쩍 늡니다. 물론 월요일엔 다시 원상복구 하더라도 말이죠.
아이의 한글 읽기, 쓰기, 어휘력은 달팽이 속도로 나아가는 중입니다. 독일 학제 7학년, 한국식으로는 중1인 아이가 한글학교에서는 초등학교 2학년 국어 교재를 사용합니다. 그래도 성적과 시험에서 자유로운 한글학교에서 부담 없이 문화와 언어가 아이에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커버 이미지: unsplash.com)
한글학교 정보
베를린에 한글 유치원이나 한국 국제학교는 아쉽게도 없습니다. 1주일에 한 번 오후 수업이 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학교는 Zoo 역에서 멀지 않은 도심 '베를린 한글학교'입니다(https://korean.hanhag.de). 예전에 좀 더 작은 세종학교도 있었지만 아쉽게 없어졌습니다. 또 다른 한글학교는 교회에서 시작한 Bundesplatz에 있는 '도담도담'으로규모가 커지고 있습니다. 한글 배울 기회가 늘어나는 건 늘 반갑습니다.
비영리 단체인 '베를린 한글학교'는 매우 저렴한 수업료로 양질의 교육을 제공합니다. 많지 않은 봉사료만 받으며 애써주시는 선생님들 덕분에 수업 질은 훌륭합니다. 교재로 수업하는 시간 말고도, 나이와 관심사에 따라 한국 무용, 북, 케이팝 시간도 있습니다. 종교 활동을 하지 않는 한국 가정에 소중한 기회인 거죠.
'베를린 한글학교'는 설날, 추석에 떡과 한국 음식을 나눠 먹고 한복 입고 세배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봄에는 운동회, 겨울에는 어린이 잔치를 크게 합니다. 아이들이 준비한 무대는 어설프고, 귀엽고, 아주 드물게는 완성도 높은 순간이 있기도 합니다. 독일학교 행사와는 다르게 선생님과 학부모 참여가 더 높습니다. 크고 작은 행사로 아이들이 다각적으로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 좋습니다. 지금은 교실과 교사 부족으로 대기자 명단에 있는 아이들이 많지만, 곧 뾰족한 방안이 생겨 원하면 모두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