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직장인이 된 직후 관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종교가 있냐고 물어보더군요. 나는 별생각 없이 솔직하게 답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어릴 때 성당에 다녔지만, 신앙도 없고 아무런 종교 활동을 하지 않은지 매우 오래됐다고요. 그러자 관청 직원은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천주교 특성상 한번 천주교인이면 평생, 그리고 세계 어디서나 천주교인입니다." 나는 그러냐고 응대했고 그렇게 무해하게 통화는 종료됐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 월급명세서를 보고 뜨악했습니다. 종교세 명목으로 세금이 더 빠져나갔습니다. 안 그래도 높은 소득세에 통일세, 사회보장금까지 내고 나면 남는 돈도 없는데, 여기에 이제 종교세까지 더해진 겁니다. 태어나서 유아 세례를 받은 덕에, 그리고 친절한 독일 공무원에게 순진하게 답변한 바람에 거의 무신론자에 가까운 내가 꼼짝없이 종교세(교회세)를 다달이 내게 생겼습니다. 한번 가톨릭 신자는 영원한 가톨릭 신자라니, 웬 횡포인가 싶었습니다.
몇 달 꼬박 납부하다가, 원하면 지역 법원에서 공식적으로 '종교 탈퇴'를 할 수 있다고 해서 간단한 그 절차를 밟았습니다. "왜 탈퇴하십니까?"라고 법원 공무원은 형식적으로 물었고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이 정해주신 종교였지만, 진실로 신앙심을 가져본 적이 없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냥 "성당 안 다녀요!"라고 했어도 그만이었을 텐데, 왠지 말이 길어지니 스스로 변명처럼 들립니다. 마음 한 구석 미안함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나는 평생 신을 믿어본 적도 없고 그저 어릴 적 신나게 성당에서 놀았던 기억 밖에는 없기에 독일에서 개신교와 천주교를 지원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환경 단체나 내가 잘 아는 NGO에 기부하는 게 낫다 싶었죠. 대기 시간 포함해 총 20분도 안 걸린 종교 탈퇴 절차를 마치고 돌아오며 당시 부모님에게는 말 안 하기로 했습니다. 두 분 다 성당에 다니지 않지만, 독일 공무원 말마따나 한번 신자는 영원한 신자임을 몸소 증명하는 두 분이었으니 섭섭해하실 것 같았으니까요.
한국 집 아파트 철문 맨 위에는 '천주교 교우의 집'이 오래도록 붙어있었습니다. 작은 회색 십자가 모양에 남색 테두리로 장식한 일명 '교우패'입니다. 어릴 적 우리처럼 '교우패'가 붙은 집을 보면 왠지 정이 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종교가 무엇이오 하고 굳이 대문에 걸어두는 건 참 특이한 관습입니다. 요새 같은 세상에 나라에 따라서는 위험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거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나무 십자가도 위엄 있게 걸려있었습니다. 집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위치였습니다. 그런데 가족 누구도 신앙심이 깊거나 정기적으로 성당에 다닌 적이 없습니다. 엄마는 성당 아주머니들과 비정기적으로 교류가 좀 있었고, 나는 학생 모임에 나가긴 했습니다. 그래도 평소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종교적' 행위와는 거리가 먼 집이었습니다. 그런 '나일론' 신자 분위기에 맞게 난 성인이 된 후론 무신론자에 가깝다고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불가지론이라는 좀 더 외교적인 옵션이 있지만, 이 표현은 참 입에 붙지 않을뿐더러 어정쩡하게 느껴져서 깔끔하게 무신론을 택합니다.
'나일론' 신자뿐인 우리 집과는 달리 아빠 쪽 친척들은 신앙심이 깊습니다. 천주교 박해 시절부터 믿었다는 데 그건 검증을 안 해봐서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나는 모태신앙이라고 '전해 들었고' 유아 세례를 거쳐 첫 영성체도 했습니다. 어릴 적 동네인 해운대의 성당에서 신부님, 수녀님, 또래 친구들과 많이 어울려 논 기억이 납니다. 피아노 학원 말고는 딱히 갈 곳 없는 내게 성당이 안전하게 놀 기회를 제공한 셈입니다. 큰집에서는 천주교식 제사를 지냈고(성경을 들고 제사상 앞에서 성가를 부릅니다.), 몇 번 장례 미사에도 참석했습니다. 아무리 무신론자 입네 해도 이런 켜켜이 쌓여온 의식들이 마음 어딘가 흔적을 남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유독 천주교에 나일론 신자, 냉담자라는 표현이 흔합니다. 비난이라기보다 자조적으로 씁니다. 개신교에 비해 사람들도 좀 허술합니다. 술 잘 마시고 노래 잘하는 신부님도 꽤 봤으니 음주가무에 관대한 것 같습니다. 이 허술함과 양면성이 내 몸에 꼭 맞듯 편안합니다. 그래서 천주교 하면 아직 짠한 감정이 듭니다. 손절할 수 없는 친척 어르신이나 미안함만 남은 헤어진 연인처럼 말입니다.
죄책감
즐거운 놀이터를 제공해 준 것 말고도 천주교가 내 성장에 영향을 준 부분은 고백성사 아닐까 합니다. 어릴 적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고백성사 날이면 이번엔 뭘 고백할지 고민했습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성당에 모여 좀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던 기억이 있습니다. 작은 나무 장에 들어가 이런저런 잘못을 했다고 말하면 가림막 건너편 신부님은 무슨 무슨 기도문을 몇 번 암송하라고 알려줍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벌칙(?)이었고 일단 잘 넘겼다고 안도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잘못을 고백했는지, 혹시 잘못하기 전 고백성사를 미리 걱정하며 몸을 사렸는지, 그런 건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나는 건 고백 일이 다가오면 벼락치기하듯 죄를 찾아내거나 지어내거나 해서 외워둔 일입니다. 아무래도 고백할 거리를 찾는 어린이와 그렇지 않은 어린이는 조금은 다르게 성격 형성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입니다. 나쁜 일이 생기면 내 잘못 아닌가 자책하곤 하는 데, 혹시 고백성사 문화 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이가 아토피로 고생할 때 왠지 죄책감이 느껴지던 그런 상황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데 왜 나는 죄책감이 들까요?
어린 시절 성당은 또래와 신나게 뛰어놀고 무대에 올릴 연극이나 노래 연습을 하던 기억이 지배적이라서, 고백성사에서 지금 내 성격으로 퀀텀 점프하려면 영 개운치 않습니다. 영향이 전혀 없다고 자신할 수도 없지만요. 꼬마가 고백할 죄를 찾아야 하는 종교의식은 실로 중세스럽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한국 천주교도 21세기를 살고 있길 바랄 뿐입니다.
(커버 이미지: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