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그 책, 그 장소
2003년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지낼 때 단짝 친구 D와 뮌헨 학회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참가비 없는 무료 학회였지만, 즉흥적으로 결정한 거라 싼 숙소는 구할 수 없었어요. '정 안되면 무박 2일로 가보지, 뭐!' 하고 기차 여행을 시작했어요. 그때 읽은 책이 "말콤 엑스 자서전"입니다. "뿌리"로 유명한 알렉스 헤일리가 말콤 엑스와 오랜 기간 인터뷰해서 쓴 책이죠. 유령 작가책으로 깍아내려졌고, 책의 형식과 탄생비화를 두고 이래저래 말이 많았지만, 느슨하게는 '자서전'에 포함된다고 여깁니다. 무엇보다 말콤 엑스의 구술에 기반한 책이라 문체가 간결하고 묘사가 생생합니다.
"말콤 엑스 자서전"은 미국 흑인 영화(African American Films) 수업을 들으며 곁다리로 읽은 책입니다. 이 수업을 진행한 강사 카트린 슈미트를 매우 좋아했기에 수업에서 언급되는 책이나 영화를 자발적으로 찾아봤더랬죠. 즐겁게 공부한 건 당시 2년 간이 유일했어요.
원래 이동 중 읽은 책이 기억에 오래 남는가 봅니다. 왜일까요. 여행이라는 설렘이 있고, 일상에서 벗어난 의외의 장소와 체험이 독서 경험에도 영향을 주는 걸까요? 바이로이트-뮌헨-바이로이트 열차 칸에서 흔들리며 읽은 문장들. 기차를 기다리며 뮌헨 중앙역 계단 어디 춤에 쪼그리고 앉아 읽던 문장들. '레드'라는 이름으로 허슬러처럼 도시를 누비던 방탕한 젊은 말콤 X부터,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입문한 독실한 종교인 말콤까지. 아버지 같던 교주의 추악한 모습을 파악하고 멀어지던 결별 시기와 메카 순례 체험까지. 2003년을 살던 나는 말콤이 겪은 격동의 시대로 빠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강력한 말콤의 연설과 유려한 정치 논리에 말입니다! 가슴에 불을 확 지르는 뜨거운 웅변 글!! 순한 맛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대비되는 매운맛 말콤 X를 당시 기득권이 무척 미워하고 두려워했겠다 싶습니다. 나는 말콤 X와 함께 울화통이 터졌고 그럼에도 초연한 그의 표정이 안타까웠습니다.
통화와 문자 기능만 있던 휴대폰 시절이라 가능했을까요. 책 한 권에 폭 빠져 며칠 여행을 다녀왔던 일 말입니다. 무박 2일 짧은 여행길에서 틈만 나면 책을 펼쳐 들었죠. 메카 순례 이후 과격 분리주의 입장에서 조금씩 멀어지던 부활한 말콤 X였기에, 암살당하기 전 영적, 정치적 변화를 크게 겪은 그였기에, 더 애가 탔습니다. '왜, 왜, 왜, 죽여야 했냐고, 이 못된 놈들아!!'
학회에 참석한 얌전한 청중 우리는(나와 D는 내향인이라 낯선 이들 틈에서 질문 같은 걸 하는 성격이 아녜요) 그날 밤, 역 근처 호스텔 비상계단에 잠입해 쪽잠을 시도했습니다. 쪼그리고 자던 우리를 보안요원이 깨웠고, 나는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나 창피했죠. 그나마 D가 독일어로 한 두 마디 변명했고 우린 그길로 쫓겨나 인근 피시방에서 밤을 새웠던 것 같습니다. 어쩜 기차역 패스트푸드 점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그 위기 상황에서 아무 말도 못 하던 나보다 D가 역시 한 수 위인 건 틀림없습니다.
내 친구 D는 불가리아인입니다. 가난한 나보다 더 돈이 없었고, 철학을 전공한 친구라 프랑스 이론가들 때문에 내가 허덕이면 큰 도움을 줬어요. 그 시절 내가 학위를 마칠 수 있었던 건 이 친구 덕분입니다. D는 술을 좋아했고 줄담배를 피웠고 밥 대신 커피를 즐겼습니다. 나와 정반대 습성을 가진 이와 단짝이 됐고, 우리는 허튼짓도 많이 하며 서로에게 앞다퉈 애정하는 책과 영화를 소개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도 즐겁게 기차를 타고 다시 바이로이트로 돌아왔어요. '우리가 뭐 놀러 갔냐고, 궁금한 학회 보고왔잖어!'
바이로이트로 돌아와 기숙사 방에서 책을 끝마쳤고, 연이어 스파이크 리 영화 "말콤 X"에 폭 빠졌습니다. 스파이크 리 영화라면 뭐든 구해서 포식하듯 봤지만, 1992년 작 "말콤 X"만큼 완성도 높은 영환 없습니다. 음악, 각본, 연기 다 완벽합니다. 이 영화가 스파이크 리와 덴젤 워싱턴의 전성기라고 확신합니다. 화려한 댄스홀의 음악과 춤이, 감옥에서 새로 태어나는 말콤의 단단한 얼굴이, 아내 역할을 한 엔젤라 베싯의 절제된 표정이 생생합니다.
무교인 나는 늘 종교인 이야기에 끌립니다. 영적인 사람이 부럽기도 하고요. 내가 말콤 X 책과 스파이크 리 영화를 숭배했던 이유는 어쩜 영적 체험, 인생의 큰 전환점이되는 극적 변화가 부러워서이기도 합니다. 그 시절, 그 책. 호스텔 비상계단에서 쫓겨난 무모하던 젊음. 공산주의 시절 불가리아 일화를 들려주던 새파란 눈의 내 친구 D 때문에 행복했던 시절입니다.
말콤 X 자서전 표지:
https://www.penguin.co.nz/books/the-autobiography-of-malcolm-x-9780141185439
스파이크 리 영화 "말콤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