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페란테의 성장 소설
"""이 독후감은 스포를 담고 있어요"""
이탈리아 소설은 처음 읽은 듯합니다. 낯설어서 기대가 컸어요. 영화 "대부"와 비교할 만한 나폴리 대하소설 총 4권을 끝내고 나니 스스로 기특한 마음에 소감을 써봅니다. 소설 읽느라 유튜브, 팟캐스트, 신문 기사도 등한시했으니 매우 오랜만에 느낀 몰입감입니다.
작가 엘라나 페란테는 필명이고 실제 원작자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작가가 신분을 드러내지 않겠다는데도 일부 매체는 집요하게 작가 뒤를 캐기도 합니다. 그녀는 출판과 동시에 책은 작가 손을 떠나 독자 몫이 되는데, 작가가 더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면 나설 필요가 없단 입장이죠. 뒤를 캐는 매체가 많다니, 그만큼 화제작인 모양입니다.
이 책 주인공은 화자 '레누'와 친구 '릴라'입니다. 두 사람의 평생에 걸친 매우 극적인 '관계'가 핵심입니다. 여기에 가족, 동창, 동네 사람, 남친과 남편, 자녀를 포함해 다양한 조연이 스토리를 풍성하게 합니다. 박경리 "토지," 조정래 "태백산맥" 바이브를 뿜는다고 하면 어슷 비교가 될까요? 작가인 페란테는 정치에 관심이 많아, 두 여성 일대기를 이탈리아 정치 한 복판으로 끌어왔다가 내치곤 합니다.
그런데, 처음 접하는 이탈리아 소설에 내가 약 3주간 폭 빠질 수 있던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소설의 통속성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질투, 섹스, 불륜, 사치, 신분 상승 욕구 등의 화려한 장신구(작가의 장치) 덕분에 긴긴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한 게 아닐까...
그중 최고 자극 요소는 '폭력'입니다. 소설 배경은 나폴리에서도 매우 볼품없는 동네입니다. 남편은 일상적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때리고, 아이들끼리도 폭력이 난무하며, 동네는 고리대금업자와 카모라(나폴리 마피아)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고, 살인 사건도 여럿 일어납니다. 이 책이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던 요인도 나폴리 하면 떠오르는 마피아, 가난, 낙후, 부패, 범죄 등의 클리셰를 잘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레누와 릴라가 어둠의 세력(돈 아킬레)에 정면 도전하는 장면("우리 인형 내놔")이 가장 인상적인 첫 액션 씬입니다.
독자가 이미 깊이 사랑하게 된 캐릭터 릴라가 결혼식 날 신랑에게 폭행당하는 장면 묘사부터, 소설 후반에 최강 빌런 미켈레 형제가 살해당하는 일까지, 폭력은 독자가 연상하는 나폴리다운 드라마적 기대를 충족합니다. 특히 2권과 3권에서 성인이 된 주인공들이 겪는 파시스트 행패, 60/ 70년대 극좌 테러리스트의 폭력도 이 소설에 정치색을 짙게 입히고 강장제 역할을 합니다.
폭력은 거칠고 불우한 캐릭터 릴라 주변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독자가 동일시하는 캐릭터 레누는 선한 쪽에 서려는 인물인데도 레누의 남편인 교수도 학생에게 총기 위협을 당하죠. 네 편 내 편, 선한 쪽 악한 쪽 상관없이 무차별로 가해지는 폭력입니다. 마침내 4권에서 가장 똑똑하고 아름다운 티나(릴라의 어린 딸)는 유괴당한 것이 분명한 방식으로 처단당합니다. 그 누구도 피하지 못하는 징한 폭력의 세계가 바로 나폴리 4부작의 핵심 자극제 같아요. 부모에게 가장 끔찍한 폭력은 자녀의 생사를 모른 채 평생 고통받는 일일 테니까요.
폭력에 버금가는 소설의 통속적 요소는 섹스와 로맨스겠죠. 어린 시절부터 레누가 짝사랑한 니노(나쁜 남자 전형)는 두 주인공만큼이나 4부작에 걸쳐 비중이 큽니다. 두 여자의 우정이 소설의 뼈대라면, 니노와의 삼각관계는 이야기의 신경망 같습니다. 어디든 뻗어있고 툭하면 통증을 일으킵니다.
2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인생의 절정기와 사랑, 열정, 절망을 다룹니다. 야반도주가 있고, 불쾌하고 수치스러운 섹스가 있으며, 빌런 미켈레가 릴라에게 갖는 위협적인 숭배와 집착이 있습니다.
소설의 통속성은 피해 갈 수 없는 걸까요? 인간은 '재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니까요? 쉽게 읽히는 소설이 내 맘을 사로잡은 덕분에 근 3주 동영상과 선정적 뉴스(어차피 '뉴스'는 태생이 자극적)를 멀리했으니, 간만의 독서 몰입이라는 순기능을 체감했네요.
나폴리 4부작은 '통속 요소'가 그득하지만, 한낱 '통속 소설'로 치부할 순 없어요. 레누와 릴라의 특이하고 집요하고 가슴 아픈(사실 레누의 짝사랑인 듯 심하게 기울어진) 이 유별난 '관계' 자체가 창의적이라고 느꼈어요. 소설을 지배하는 이 기이한 관계성이 작품에 문학성을 더합니다.
대중성과 문학성을 둘 다 달성하려면 작가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책의 가치는 널리 읽혀야 드러나고 퍼질 텐데, 아무도 읽지 않거나 극소수만 읽는 책은 가치가 묻혀버리는 거 아닐까요.
자기만족, 자기표현으로 공들여 책을 쓰고 '성장'하는 작가가 있다면야 예외입니다.
우리는 내 이야기를 남들이 재미있게 읽어(들어) 주길 바라죠. 폭력, 섹스, 돈(사치)이라는 고전적 오락 요소를 적절히 사용해 독자에게 감동과 재미를 줘도 '충분하다'고 말해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교육의 힘으로 빠져나와(공부, 글쓰기) 자립한 주인공과 성장 소설이 주는 대리 만족도 큽니다. 고난을 딛고 일어선 허구의 인물을 응원하며 힘든 지금의 내 삶을 위로하고 더 버텨볼 수 있겠죠. 내 시간을 훅 앗아가도 아깝지 않은 긴긴 책. 이 책에 별점 5점 만점에 4점 주겠습니다. ⭐⭐⭐⭐
(그림 4개는 구매한 전자책 커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