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귀멸의 칼날, 호텔 델루나
몇 년 전, 학교 미술 수업에서 프리다 칼로 그림을 배웠다며 아이가 자랑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만 9살이었습니다. 어떤 그림들이었는지 아이가 묘사하기 시작했고,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아 이미지 검색을 시작합니다. 놀랍게도 아이가 수업에서 본 그림은 신체 훼손, 엄마 뱃속에서 죽은 태아가 등장하는 피 칠갑 작품입니다.
"선생님이 정말 이 그림 보여줬어?"
"어, 이거야 이거!"
"..."
"난 미술 시간이 젤~ 좋아!"
"그림, 좀 끔찍하지 않어?"
"아니! 나도 이런 거 그리고 싶어!"
프리다 칼로를 가르쳐준 미술 선생님을 마구 응원한 초심은 사라지고, 고어한 그림에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는 아이 앞에서 당황합니다. '나, 과잉보호하나?'
모니터 앞에 나란히 앉아 강렬한 이미지들을 훑고 있자니 별생각이 다 듭니다. '부모에게야 한없이 어리지만, 이렇게 세상에 노출되며 성장하는 게 건강한 거겠지? 독일 공교육 노출 수위에 나도 적응해야 하는 거겠지?'
수업 시간에 들었다는 프리다 칼로 생애도 줄줄 얘기하는 아이. 프리다 남편은 천하 바람둥이라 맘고생이 심했다는 것부터, 교통사고로 몸이 박살 났다는 것, 유산 등 평생 신체 고통에 시달렸단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정말 난 쿨한 엄마이고 싶은데, 문화 충격에 말수가 적어집니다. 꼬맹이 입에서 불륜, 유산의 고통이 나오다니...
언젠간 알게 될 것들을 그래도 선생님 통해서 배우니, 다행으로 여겨야 했을까요. 무튼, 프리다 칼로 사건은 아이에게 무엇을 언제 어떻게 노출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어요.
만 열두 살 딸이 방학 동안 참여한 만화 그리기 수업에서 "데몬 슬레이어(귀멸의 칼날)" 만화책을 접했습니다. 독일에서 이 책 등급은 만 13세 이상입니다. 아이는 도서관에서 이걸 찾아내곤 꼭 빌려 가겠다며 졸라댑니다. 독어본은 다 대출 중인지 마침 영어본만 있습니다. '음, 그럼 영어 공부하는 셈 치고 보여줘?' 나는 못 이기는 척 "그럼 조건이 있어. 데몬 슬레이어는 꼭 영어로만 읽어"하고 허락합니다. '흑백 만화책이 뭐 끔찍하면 얼마나 끔찍하겠어...'
아이는 몇 줄 되지 않는 영어 대사를 읽긴 한 건지, 선정적 그림 위주로 보는 건지, 하여간 도서관 책으로 총 23권을 다 뗍니다. 여주인공이 악귀로 변한 그림은 내가 봐도 섬뜩합니다. 잔혹해서라기보단, 왠지 여자아이 신체를 성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괴수의 끔찍함에 섞여서 기분이 나쁩니다. 왜 만 13세 이상인지 이해 갔어요. 딸에게 내가 왜 데몬 슬레이어를 싫어하는지 몇 번 말해줬지만, 한 귀로 흘렸을 게 뻔합니다(어린 여자 몸 묘사가 성적이고, 끔찍함을 결합해서 더 선정적이야 등등...).
그러는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청소년 아이돌이 성적 코드 잔뜩 들어간 K-pop 춤추는 영상을 함께 보고 실컷 따라 하게 냅둔 전력이 있습니다. 때깔 좋고 샤방샤방한 K-pop으로 포장하면 허락, 안 그래도 마땅찮은 '일본' 문화인 데다 고어물과 결합한 성적 코드면 단죄. 아이도 일관성 없는 내 태도를 아는 것 같아요. "엄마, 일본 싫어하잖아!"라고 한 소리 들을 때마다 정색하며 "누가 일본이 싫대? 일본 극우 정치인들이 싫고, 독일 하곤 다르게 역사 교육 안 시키는 일본 지배층이 싫은 거지!"라고 항변합니다.
독일에서 일본 문화 상품을 즐기는 딸을 보면 왠지 조바심이 나요. 한국 문화, (그 어려운) 한글 하나라도 더 배울 시간을 엄한 데 뺏기는 느낌이죠.
아이에게 노출할 영화, 책 수위를 어떻게 조절할지, 원칙은 (아직) 없습니다. 답은 '그때그때 달라요~'니까요. 나의 만 12살 시절을 돌아보면 부모님이 해준 이야기, 가족과 함께 본 것보다는 또래 친구들과 한 상호 작용이 훨씬 더 영향이 컸어요. 내 아이도 그러려니 합니다. 뭐든지 또래와 겪고 나누고 체험하는 게 더 중요한 시기니까요.
이런 물렁한 내 태도에 반론이 분명 있습니다. 애비게일 슈라이어는 "부서지는 아이들"에서 학교나 부모가 미리 수위 높은 이야기로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다고 합니다. 마약 교육, 성교육, 자해 & 자살 방지 교육 등을 어른들이 너무 일찍 나서서 하다 보면 아이들 호기심을 자극하고 역효과 나기 십상이란 거죠. 이 말도 틀리진 않아요. 균형점을 찾는 건 영영 쉽지 않겠죠.
"여신 강림" 이후로 뜸했다가, 주말에 아이와 볼 K 드라마로 최근 "호텔 델루나"를 골랐습니다. 독일에서는 만 14세 이상 관람입니다. 호러와 코미디를 좋아하는 딸은 후보작 예고편 헌팅 끝에 "호텔 델루나"를 뽑았어요. '그래 뭐, 좀 있으면 만 13세니 한 살 차이니까...'
끔찍한 귀신 분장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딸은 팡팡 터지는 도파민을 한껏 즐깁니다. 호러물은 이미 "신비아파트"와 "귀멸의 칼날"로 익숙하니까요.
손가락 끝으로 쇼츠를 눌러가며 보상/ 쾌락 회로에 뇌를 절이는 게 아닌, 서사 있는 호흡 긴 영상물은 이제 많이 풀어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함께 드라마에 몰입하는 이 시기도 오래 안 갈 수 있으니까요. 원칙과 일관성 없이 그때그때 건별로 대응하며 일단은 이렇게... 그냥 가보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