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그 40.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셸리 케이건 지음, 김후 옮김 / 안타레스

by 몬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모순 투성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간혹 있다. 동물을 사랑한다. 동물을 먹는 것도 사랑한다. 한편에는 집안의 막둥이로 예쁨 받는 댕댕과 냐옹이들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주인을 잘못 만나 어두운 거리를 헤매거나 고통받는 아이들이 있다.


한 종안에서 각 개체가 받는 대우가 다른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이해는 가능하다. '팔자'로 설명하든 '수저론'으로 설명하든 사람 역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으니까. 하지만 한 종과 또 다른 종이 받는 대우가 왜 달라야 할까, 생각하면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흔히 이야기하는 '왜 개는 사랑하면서 소는 먹을까'의 문제다. 강아지나 고양이는 가장 사람과 친근하며 함께 살도록 진화했으니까? 그럼 도살장에 끌려가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소는?


그렇다면 동물 복지의 대상은 기쁨이나 고통을 느끼는 모든 동물들로 확대되면 되는 걸까. 그러나 쾌락과 불쾌의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조건을 한정짓는다면 또 문제가 생긴다. 포유동물 이외의 동물군을 포함시키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들도 고통을 느낀다는 다양한 연구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고통이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을 때 자신도 모르게 손을 빼는 것과 같은 본능적인 반응인지,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는 등의 다층적인 주관적 경험인지 알기 힘들다. 미래에 과학이 어떻게 발달할지 모르겠지만, 아직 다른 종의 마음은 미지의 영역이다.


이 시점에서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에 근거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몸에 갇힌 우리는 인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생명의 무게를 잰다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생각해보자. 사람과 강아지의 삶의 무게는 똑같을까. 만약 사람과 강아지가 동등하다면, 강아지와 개구리는 어떨까. 모든 생명의 가치는 동등한 것일까.


우리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 즉 '지각 능력'의 유무로 생명체의 권리를 판단하곤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는 한 생명체가 가진 권리를 의미하는 '도덕적 입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지각 능력만으로 도덕적 입장, 즉 존중받을 권리를 설명하기는 충분치 못하다고 말한다. '행동 능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다. 스스로 지닌 의지와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이다. 저자는 이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른 종이 가진 권리의 수준은 서로 다르며, 특히 사람과 동물의 권리는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사람과 동물이 기본적으로 동등하다는 주장을 책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논박한다.


그렇다. 저자는 사람과 동물이 동등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주장을 문장 그대로만 읽으면 큰 거부감이 생길 수 있다. 자칫 사람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거나 동물의 생사여탈권을 쥔 것은 사람이라거나 동물을 도구적 관점으로 낮추는 입장들과 동급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그러나 책은 동물이 윤리적 관점에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소위 '단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목적은 같다.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과 동물의 공존'이자 '동물의 행복'일 것이다. 단지 취하는 접근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큰 것 같긴 하다.


동물윤리가 철학적 관점에서 논의된 지 이제 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저자는 개념이 발전하며 체계화되는 동안 주류를 차지한 건 사람과 동물이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단일주의'였다고 설명한다. 인간사회의 윤리를 동물권리로 확장한 노고를 인정하지만, 새로운 이론적 토대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처음에는 저자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국내외 유명 동물권 단체의 활동을 떠올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 또한 사람과 동물이 동등하다는 주장에 가슴으로는 늘 공감했지만 늘 의문이 남았다. 물론 사람도 동물이며, 목숨은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이런 주장만으로는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평등과 모순을 설명할 수 없다.


왜 개는 사랑하고 소와 닭은 먹을까. 그럼 소와 닭도 먹지 않으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오곤 한다. 그런가. 평등과 복지의 대상을 점점 넓혀간다는 주장의 밑바탕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동등하다는 주장으로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일부의 동력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라는 의문. 너무 이상적인 목표가 아니냐고 물으면 이상을 꿈꾸지 않으면 현실에 머무르게 된다는 답이 돌아온다. 감성에 호소하는 것도 좋지만,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리고 사람과 동물이 똑같이 대우받아야 한다면, 생물종 사이의 차이는 무시되어야 한다. 글쎄, 사람과 동물이 평등하다는 주장에 동의할 사람은 많을 것 같지만, 강아지와 개구리가 동등하다는 주장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저자는 단일주의를 반박하고, 자신의 논리를 발전시켜 결국 동물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향상되는 길과 연결 짓는다. 결코 읽기 쉽지만은 않았던 이 책을 읽으며 제대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질문의 힘이다. 서로 의문을 던지면 그 자극이 생각을 발전시킨다. 집단지성의 시대에 가장 적합한 성장 방법이 아닐까.


인간이 없으면 지구도 살아날테고, 속 시끄러운 저 인간보다 우리 집 강아지가 더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도 맞다. 하지만 우리는 타노스도 아니고 당장 다른 행성으로 꺼져버릴 수 있는 연락선도 없다. 복닥복닥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인간 나빠'로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것보다는 골치 아프더라도 생각에 생각을 모으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나와 조금 다른 의견이더라도. 인간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종의 입장을 다 헤아리고 함께 살아가는 길이 쉽겠나. 쉽지 않은 길을 쉽게 포장하는 것도 문제다.


다음에는 머리가 뻥튀기처럼 좀 바삭바삭할 때 다시 읽어봐야겠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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