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회 지음 / 제철소
지금이 좋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미 멀어지는 가을을 바라보고 있다. 또 짝사랑이다. 한국의 여름과 겨울은 둘 다 내겐 너무 극단적이다. '낀 계절'이라 명명한 봄과 가을은 점점 짧아지는 것 같다. 이 짧음을 애틋하게 붙잡으면 될 일인데 쉽지 않다. 가을이라는 게 언제 왔다가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쾌청한 서늘함이 싸늘한 공기로 바뀌면 이 계절이 무르익었다는 걸 실감하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뒷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예전에는 '말이나 살쪄라, 사람은 내버려두고'였다면 이제는 '살찔 시간이 부족하다, 가을 좀 늘려달라'가 내면의 외침이 됐다.
그럼 가을과 겨울의 경계는 무엇일까. 지구 반대편에 사는 외국 친구가 물어봤을 때 머뭇거렸다. 그 친구의 정확한 질문은 한국에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이 언제냐는 것이었다. 그 나라에는 사계절이 없다. 건기와 우기가 있을 뿐. 절기 구분 말고, 내가 느끼는 겨울이 언제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글쎄, 손을 호호불다가 괜히 친구를 꼬드겨 어묵탕을 먹으러 가고, 소주를 홀짝이는 친구 옆에서 나는 열심히 어묵탕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가을이 언제까지이든, 겨울이 언제부터이든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 스르르 닳아 없어지는 게 속상하다. 다시 돌아올 것을 안다. 그래도 2020년의 가을일 수는 없다고 유치하게 떼쓰고 싶다. 괜히 질투 작전을 쓰는 것처럼 가장 여름다운 책을 읽어보기로 한다. 물론 지나가는 계절은 내 행동에 관심이 없다. '아무튼' 시리즈를 오랜만에 찾았다. 언젠가 서점에서 <아무튼, 여름>이라는 제목을 본 기억이 났다.
읽을 일이 없을 책이라고 확신했던 책이다. 단순한 이유, 여름이 싫다. 어릴 땐 더위를 더 많이 탔는데, 체질이 바뀐 건지 요즘은 더위보다 추위가 더 버겁게 느껴진다. 평소 손발이 찬 편이기도 하고. 사정이 이렇다면 여름이 오는 길목에 레드카펫이라도 깔아드려야 하는데, 마음은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다. 여름, 하면 끈끈하고 축축 늘어지는 불쾌한 감정이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른다. 마음 좀 넓게 가지자고 아무리 다짐해도 지하철에서 어깨를 맞대는 동료 시민들에게 이유 없는 적대감이 드는 계절, 여름.
여름에 비록 복숭아, 무화과, 포도, 방울토마토, 단호박, 리넨 옷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만회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쓰고 보니 90퍼센트는 먹는 것 얘기다.
여름이 너무 좋다고, 너무 좋아서 견딜 수 없으니 왜 좋은지 조목조목 적어봐야겠다고, 여름이 좋은 이유를 남들과 나누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책을 읽다니 역시 사람은 살고 살아 볼 일이다. 지은이는 여름이 좋은 이유를 쭉 열거한다. 플링, 초당옥수수, 수입맥주_만원에네캔, 머슬 셔츠, 수영, 샤인머스캣, 호캉스, 전 애인, 괌, 식물, 혼술, 옥천냉면, 치앙마이, 레몬 소주, 대나무 돗자리, 낮술, 여름휴가 등등.
마치 짧은 잽을 날리는 것 같았다. 물론 사정거리에 들지 않도록 마음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읽었다. 그래도 몇몇 단어에 마음이 동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영 좋지, 참, 새싹 보리를 심었어야 하는데, 무화과나무도 들이려고 생각하다가 계절이 지났네, 옥천냉면? 여기가 어디지. 나중에 찾아서 가봐야겠다. (물냉을 시킬 것, 메모) 낮술은 좋은데 같이 먹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 경험한 적이 없어서 마음이 동하는 것도 있었다. 여행지에서 짧게 하는 연애를 플링(fling)이라고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초당옥수수도, 샤인머스캣도 아직 먹어본 적 없다.
이상하게 읽다 보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던 건, 이전의 기억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직 해보지 않은 게 많이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지난 주가 된 한 주동안,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하고 싶은 일을 억눌렀음에도, 해야 할 일을 생각보다 잘 해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마음을 끌어내리고 있었나 보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 해보지 못한 것은 많이 남았고, 내일은 오늘과 조금 다를 테니까.
페드로, 패딩을 입기 전에는 무조건 가을이야. 올해는 길게 버텨보겠어. (과연)
어쩌면 내년 여름은 올해 여름보다 더 좋아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