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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Nov 15. 2020

읽그 44. <불볕더위에 대처하는 법>

매기 오파렐 지음, 이상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그럴 때 있지 않나. 핸드폰 액정을 봤는데 하필 4:44가 떠 있는 날. 그 시각을 본 날이 그날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왜 또 딱 맞춰서 보게 됐지, 했다가 곧 잊는 날. 미신을 거의 믿지 않는다고 평소 생각하면서도 왠지 신경이 쓰인다. 2시 31분이면 의미 부여 따위 하지 않을 텐데.


이 소설의 가족에게 닥친 일은 우연한 숫자 조합을 일별한 것보다 심각하다. 1970년대, 한 아일랜드 가족에게 벌어진 일이다. 아버지가 어느 날 사라졌다. 그레타의 남편이자 마이클, 모니카, 에이바의 아버지인 로버트가, 신문을 사러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간 다음 돌아오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특정 시각을 보게 된 것만큼이나 우연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실종이다. 은행에서 돈까지 몽땅 인출해 사라질 이유라곤 찾을 수 없다. 로버트는 목소리 크고, 호기심 많고, 주변 사람 많은 아내 그레타의 자장 안에서 살아간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인물이 갑자기 왜?





그 이유를 알려주기 전 소설은 부부의 자녀들, 마이클, 모니카, 에이바의 이야기를 파고든다. 내성발톱의 고통에 어느 정도 둔감해져 그럭저럭 참고 살아가듯이 그들 모두 삶에 파고든 문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마이클은 갑자기 가정을 뒷전으로 여기는 아내의 모습에 힘들어하고, 모니카는 두 번째 남편과 그 아이들에게서 밀려나는 느낌을 받으면서 집에 영 마음을 붙이지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집안의 골칫덩어리였던 막내 에이바는 어느 곳에도 쉽게 정착하지 못한다.


현재의 고통을 꾸역꾸역 견디는 데는 다 사연이 있다.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그것, 각자의 비밀 때문이다. 마이클은 부부관계가 파탄까지 이른 데는 자신의 책임이 있다 여기고, 모니카는 첫 번째 남편과 관련된 과거의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와중에 빚어진 오해로 사실상 에이바와 의절하기까지 했다.


괜찮은 척 삶을 이어가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뻔뻔하게 괜찮은 척하는 내 얼굴을 본다. 특히 에이바의 이야기가 깊이 남는다. 에이바는 가족에게도, 만나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난독증을 고백하지 않는다. 안경을 두고 나온 척, 읽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척 연기를 하며 그때그때 상황을 모면하기에 급급하다.


왜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비밀을 만드는지, 또 비밀을 만듦으로써 나 자신이 얼마나 남루해지는지 생각한다.
타인에게 나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주지 않는다는 구실로 내 남루한 현실을, 또 새로운 도전을 감추곤 한다. 도전을 알리지 않으면 실패를 알릴 일도 없으니까.




삶에 찾아드는 고난과 도전장은 결국 모두의 것이다. 아버지의 실종 이후 나흘 동안, 자녀들의 사연이 결국 가족 전체로 확대되는 것처럼,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책 속 세계를 감싸는 인정사정없는 더위처럼.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76년에는 실제 지독한 가뭄이 영국을 덮쳤다.


가뭄도, 폭우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재난이다. 소설의 모티브가 된 가뭄은 우리가 삶에 찾아드는 우연한 재난을 피해 갈 수 없음을 은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4시 44분이 매일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어쩌다가 그 시간과 하필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썩 별로인 사건은 예기치 않게 찾아들고 마는 것이라고. 하지만 찜찜한, 불쾌한, 때로는 너무 명백하게 불행으로 읽히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 사실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이 가족이 한 곳에 모이는 모습을 끝까지 읽으며 생각했다.  


에이바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난독증을 고백하는 장면을 읽었다. 그렇다. 우리 모두 어떤 시점에서 비밀을 말하고 싶어지는 사람이 생긴다. 그때는 없던 용기도 생긴다. 지금이 아니면 말하지 못할 것처럼 절박하게 내 두려움을 나눈다. 이게 어쩌면 작가가 심어놓은 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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