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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Nov 23. 2020

읽그 45.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김솔 지음 / 아르테


-나 오늘 낮에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

-무슨 샌드위치?

-글쎄, 그냥 단순한 걸로.

-단순이라.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 나. 때는 1868년, 벨기에의 가장 퀴퀴하고 으슥한 곳을 누비는 사내가 있었어. 그는 사실 그런 냄새나는 골목에 있기에는 너무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남자였어. 유럽에 최초로 문을 열고 귀족들을 받아들였던 호텔의 유일한 상속자였거든.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귀한 신분과 막대한 부를 알기도 전에 허기와 갈증으로 숨이 끊어질 판이었어. 춥고 몸까지 아픈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하루 전에 빵 한 조각을 훔치려다가 눈치 빠른 빵집 주인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가장 근원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눈치 없는 유모가 그의 어머니의 지시를 잘못 이해해 자신이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담요를 어린 상속자에게 뒤집어 씌웠기 때문이야. 형부가 자신의 아들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그를 하녀의 아들과 바꿔치기 해 빼돌릴 생각이었는데, 유모는 가장 질박한 재질과 단순한 모양의 강보로 그를 감싸라는 지시를 잘못 이해해 장차 호텔을 이을 고귀한 아이가 갖고 있던 것 중 가장 단순한 디자인으로 아이의 몸을 감쌌어. 단순함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아이의 운명을 바꿔놓았지. 하녀의 아들은 목숨을 잃었고, 호텔의 진짜 상속자는 허름한 골목에서 생을 마감하기 일보 직전이었어.  

-뭐?




소설이 이야기로 차 있는 것은 당연하다. 여백의 미를 자랑할 수 있을진 몰라도 진공 상태여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최근 읽은 소설 중 이 소설만큼 왁자지껄하다는 느낌을 준 작품은 없었다. 짧은 이야기를 모은 이 책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은 금요일 오후 5시 서울역에서 느낄 수 있는 피로감을 닮았다. 장면 묘사의 하이퍼 리얼리즘 덕분이 아니다. 이 책에서 쏟아지는 목소리에 넋을 놓게 되는 경험은, 각자의 목적의식에 사로잡힌 불특정 다수를 위한 대규모 공간에서 시시각각 지쳐가는 것과 비슷하다.

**첫 단락, 인물의 대화는 책에서 받은 느낌을 설명하기 위해 써본 글이다


책의 등장인물들은 이야기의 명수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역사와 과학과 예술 이야기를 절묘하게 끌어온다.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백과사전을 총동원한듯한 박식함으로 논거를 탄탄히 보충한다. 그러나 흠잡을 수 없을 것 같이 유려한 주장은 오히려 그 유려함 때문에 청자를 밀어낸다. 자신의 입장을 유리하게 대변하기 위해 저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거리감을 두고 인물의 말을 곱씹게 된다. 알쓸신잡형 인재들의 청산유수를 보며 팔이 얼마나 안으로 굽을 수 있을지, 인간은 얼마나 자기애에 충실한 존재인지 새삼 되새기게 된다고 해야 할까.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재미있게 만들어준다. 궤변이라고 입을 막아버리는 대신 그들의 무리한 주장을 계속 더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책에는 선을 가지고 노는 자유로운 드로잉의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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