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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아라 Feb 04. 2022

새알이에게

도시의 가난함에 대해

기약 없는 방학을 선언하고 생긴 오랜만의 주말에, 그간 가고 싶었던 워크숍을 신청해 찾았다.

지역의 "입말음식"을 잘 정리해 맛보고, 체득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지역 산물의 향과 맛은 비말 차단이 의무가 되어버린 시기에 더욱 호사스러운 경험으로 남았다. 수업 중에 나온 이야기가 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매일 하는 지난한 가사 노동, 그렇지만 때때를 잘 챙겨 누리는 입 안의 호사가 가득한 지역의 다양한 입말음식에 대한 이야기 속에


"도시는 가난해요."


라는 표현이 귀에 박혔다. 실지로 도시는 가득 차 있지만 가난하다. 호화롭다가도 금세 가난해지는 마음을 채우기 위해 쫓기는 심정으로 배우고 채운다. 금세 찼다 사라져 버리는 헛헛함 속에서 방황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눈으로도 단박에 들어오는 촘촘함 안에서 마음 둘 공백을 찾느라 되려 바쁘다. 서울에 비해 작은 도시가 고향인 내게도 확실히 서울을 벗어나 볼 수 있는 헐거운 마을의 풍경이 황량하기도, 편안하기도 하다. 느긋함은 실지로 물리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연말에 더욱 거세지는 감염 속도와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 등 매일 뉴스를 들으며 쪼그라든 마음이 더욱더 쪼그라들고, 나의 안위만을 생각하게 되는 작은 마음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가난한 마음을 고생을 무릅쓰고 봉사하며 따뜻하게 채우고 싶다는 지극히 자기 위안적인 이유에서 오래 고민하던 유기견 임시보호를 마음먹고, 베라의 구조 처인 사설 쉼터로 혹시 임보가 필요한 개가 어떤 개가 있는지 여쭈었다. 그냥 그날은 그렇게 저지를 용기가 있었다.


손을 절대 타지 않아 임보 입양 공고에도 올리지 않은 작고 하얀 개, 새알.

동지 팥죽 새알의 새알이를 가슴에 묻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같이 입소한 동지, 팥죽은 입양길에 올랐지만, 새알은 절대 잡히지 않아 병원도 못 가고, 씻지도 못하고, 주로 혼자 노는 그렇지만 먹을 것만은 꼭 받아먹으러 오는 무표정한 작은 흰 개. 그를 데리고 와야겠다고 한 것은 훈련으로 금세 괜찮아지리라는 내 무지와 오만에서였다. 사람을 좋아해 입양을 잘 갈 것만 같은 작은 개보다 갈 곳 없는 개의 행방이 더 마음이 쓰였다. 나는 그렇게 새알이에게 도시의 작은 지옥을 선사한 샘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어려워하긴 했지만, 그를 굳이 길들이려고 하지 않은 구조자 분들의 집에서 꼬리를 흔들고, 잘 먹고, 개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봤기에 금세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쓸모없는 후회만 가득하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베라와 내가 오래 산책하는 아침 시간만 되면, 새알이는 평소 불안해하며 들어가기 싫은 케이지에 스스로 들어가 자신도 함께 가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동물의 뜻은 아무도 속을 모르지만, 그가 작은 집에서 나와 베라와 함께 겪는 시간이 싫다며, 나가서 해를 쬐고, 걷고 싶다는 것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처음은 케이지 안에서만, 두 번 째는 산책 친구와 케이지로 이동해 케이지 바로 앞의 조금의 땅의 냄새를, 세 번 째는 이동 가방 안에서 네 번 째는 바깥에서 1시간이 못 되는 동안 조금의 이동거리를, 다섯 번째는 차로 이동해 내 일터 앞의 작은 풀 숲에서 대변도 보며 목줄을 차고 꽤나 잘 따라와 주었다. 내가 싫어도, 새알은 그만큼 바깥세상을 그리워하고 바랬다. 여섯 번째의 날이었다. 새알의 적응에 온 힘을 쓰느라 모두가 지쳤는지 보통보다 한 시간 정도 늦잠을 자 산책 친구와 만나지 못했는데, 그날 꾼 꿈이 이상해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꿈에서 나는 깨끗한 상태의 까만 트래킹화를 신고 있었다. 어느 순간 양발의 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 하염없이 까만 신을 찾으며 돌아다니다 어딘가에서 놓인 신을 보고 신지는 못하고 잠에서 깨었다.


일어나서 함께 나가겠다고 의사를 표하는 케이지 안의 새알을 들고, 베라와 익숙한 산책길로 나갔다. 소나무가 우거진 중정의 산책길에 케이지를 놓고, 오늘은  이만큼의  바퀴만 돌아야겠다 생각하고 케이지문을 열었다. 집을 나서기 , 전날 도착한 튼튼한 하네스, 새알이가 입으로 물어뜯지 못할 단단한 하네스를 보며, 이걸 입히려고 하면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겠지 하고 심호흡을 하다, 오늘은 그저 짧게, 가볍게만 돌고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으로 평소대로 목줄만 채운 채로 나선 참이었다. 사고는  그렇게 나는 것인가 보다.  네번 정도 코에 익은 장소에 도착한 새알은 이제 쉽게 케이지에서 나와 주위를 따라다니며 소변을 보고 냄새를 맡았다.  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따라오는 방향이 이전보다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목줄이 팽팽해지면 당기는 것을 늦추고 가만히 기다려 오기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조금씩 움직였다. 다시 움직이지 않아 가만히 뒤를 돌아 앉아있는데, 어느 순간 목줄이 느슨해져서 돌아보니 새알이 내게  것이 아닌, 목걸이와 목줄이 모두 빠져있었다. 분명히 몹시도 두려워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덜컥 내려앉는 마음이 아닌 새알이도 나도 서로를 가만히 보았다. 케이지는 우리와   곳에 놓여있었다. 순순히 잡힐 애가 아니었다. 신나게 뛰어다니다 잡으려는 나와 베라의 반대 반향으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기억이 생생하. 그렇게 100미터가  되는 거리 앞에서 찾는 이들에게 달아나는 과정을 겪은 것이 3 째였다. 그날은 어렵게 전문 구조대와 연락이 닿아 같은 장소에 나타나기를 바라며 자주 목격된 장소에 밥을 두고 잡거나 부르지 말라는 전단을 새로 뽑아 영역을 넓혀 붙이려 주위의 사람들까지 동원해 다음 날의 포획, 구조를 준비하던 날이었다. 주위로 사람들이 전단을 붙이러 떠나고 베라와 나는 수정한 전단을 출력소에 맡기고 잠시 차에서 다음  일을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아침마다 하던 로드킬 신고 확인을 거른 터라 다산콜로 전화했다. 용산구에서 1 건의 로드킬 신고가  시간 전쯤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  근처 국립극장 경비님이 자정 무렵에 전화를 하셨었다. 작은  개가 길을 건너는 것을   같은데, 목에 걸린 펜던트는 어두워서 보지 못했다고 했다.  목소리를 듣거나 모습을 보면 줄행랑을  숨어버리는 터라 가서 보더라도 잡을  없으니, 쓰던 수건과 냄새가 많이 나는 사료를 뜨거운 물에 불려 목격 지점과 가까운 유실지점 근방에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길 바랬지만,   주위를 돌아다니다 이미 건넌 적이 있는 큰길에 누워있는 새알이를... 수거 업체보다 먼저 가서 발견했다. 아직 따뜻한 새알이의 몸을 담요로   차가 있는 쪽으로 겨우 건너는데 메마른 눈에서는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수백  미안하다고 말해도 그저 그것은 새알이에게 닿지 않는 독백 뿐이었다. 전단지를 넣었던 박스에 새알이를 눕히고 곳곳에서 전단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실을 바로 알렸다. 사죄의 말이 넘쳐흘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간 훈련한답시고, 밥을 나눠 먹인 것도,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은 것도, 목줄을   걸지 않은 것도 이제  소용이 없는 일이지만 내가 저지른 일의 참혹함 앞에서 목놓아  수밖에 없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에게는 그저 죄스럽기만 했다. 나를 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SNS 계정에서 소식을 보고 바로 달리는 시시비비의 말들에 그럴 만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좋은 먹이도, 영양제도, 예약해  방문 훈련도 필요치 않고, 내가 새알이를 서울에 데려와 겪게  것은 그저 도시의 빈곤한 마음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하다. 굶주린 배로 순천의 들과 산을 무리 지어 다니던 그때가  좋았을까 묻고 싶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다. 그저 남은 사람의 안위를 위해 하는  친구는 어디에서도 어려운, 잡혀 들어온 이상 안락사가 아니면 다른  곳이 묘연한 그런 생명이었다는 위로의 말은 죽음을 정당화시킬  없다. 길들이기 위해,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도 인간이 잡아들인 이상, 응당 해야  일이라 죽음에 대한 변명이  뿐이다.


 잘못으로 보낸 생명이 새알이 뿐은 아닐 테다. 그럼에도 이렇게 명명백백히 내가 자초한 일을 목도한 것은 아마도 처음인  같다. 새알이는 사람과 있다면 언제까지나 불행한 얼굴로  것만 같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인간과 사는 법을 알려준다는 생각은 참으로 오만이었다. 그는 결국 튕겨나갔고, 신나게 뛰어다니던  날을 제외하고 지친 잿빛이 되어 홀연히 가버렸다.


새알이와의 인연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날이 갈수록 생각이 겹겹이 쌓이지만 여전히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다. 한 꺼풀의 용기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새알이를 내게 보내기 위해 애썼던, 일면 일식이 없음에도 절박한 소식을 듣고 자기 개처럼 같이 찾던, 구조자들에게 어떤 응답을 보내야 할지…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란 뭘까, 인간이 동물을 구조하고 길들이고 기른다는 것은 뭘까, 이안과 아몬을 간병하면서도 생각해 본 질문이지만, 인간이 동물을 기를 자격이 있나와 같은 원론적인 자기 물음이 생겼다. 살아있는 새알이를 보면서도 여러 번 되물었던 질문이었다. 모든 개가 반려동물이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모든 개는 반려동물이다."를 구호로 펼치는 캠페인은 개죽음 앞에서 놓으면 안되는 일말의 희망을 말하는 노력일지도,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강구하는 의지일지도 모른다.


허망한 죽음을 놓고 무엇을 해야 할까. 결국은 나은 삶에 대한 의지로 시작한 일이 내게 가르쳐주는 바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답을 찾으려 봉사 활동을 신청하고, 곁에서 뜨겁게 숨 쉬는 생명에 애정으로 응답하면서도 모든 생명의 존엄을 위해 인간이 하는 일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고, 짙고 무서운 진실의 표면만을 핥는 모습을 보는 듯 마음 한켠이 무겁다. 참으로 보잘것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받아들임으로써 나와 베라의 삶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내 동물 친구들의, 또 죽임을 당하고 먹히는 동물들의 삶과 죽음에 더욱 가까워졌음을, 살고자 하는 의지는 새알이에게도, 모든 동물에게도 있음을 안다. 인간의 개입이 어떤 방향과 범위여야 하는 지를 여전히 생각한다. 얼마만큼의 조심스러움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를 놓쳐버린 강렬한 기억으로 다시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에 재고에 또 재고를 하게 되지만, 함께 사는 모습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하얗고 불행했던 새알이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온통 모호한  중에 하나 분명한 것은 다름이 없는 생명의 의지를 똑바로 바라보고 존중하고자 매일 애쓰는 마음들에 허망함이 깃들지 않도록 부재와 슬픔, 공허함, 무력감에 주저앉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을 돌보며 그저 매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도돌이표   마냥 다짐하고 다짐한다.


미안하다. 새알아.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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