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3일 작성
조금만 방심하면 냉장고라는 생태계는 부패와 죽음의 길로 빠져들고, 재생이나 부활은 온전히 내 몫이다. 자칫 잘못하면 미라 저장고로 남아있게 된다. 유물을 캐는 심정으로 냉장고를 청소하며, 이 짓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한동안 냉장고 부패 더미의 굴레를 반복하며, 남의 손에 내 끼니를 모두 맡겼다.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적어도 요식업계에 종사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은 "남이 만든 음식"이라는 데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자세히 따지고 들면, 남이 만든 음식인데, 그 음식이 아예 모르는 사람이 만든 음식이라면 이것저것 까다로운 평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프거나 주관적인 잣대질에 맞게끔 잘 만들어야 하고, 아는 사람이 만든 음식이라면 친하면 친할수록 맛과 상관없이 맛나거나 맛없다. 아니다. 엄마의 음식을 생각해보니, 맛있다기보단 좋다고 해야 할 성도 싶다. 여하튼, 내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저리 고나리질에 거드름을 피우며 맛있네, 맛없네라는 말을 하는 것이니 특별한 기준은 없다고 본다.
다행히 내가 사는 곳 근처는 채식을 권장하는 종교의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꽤~ 괜찮은 밥집이 조금만 걸어가면 몇 군데 있다. 채식과 괜찮은 밥집의 상관관계가 무엇이냐고? 여기에 나름의 지론을 펼쳐본다. 만원 이하의 가격대에서 매일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당연히 한식 밥집일 것인데, 가격대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5천 원~8천 원 사이의 메뉴를 생각해보자면 대략 이렇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비빔밥, 부대찌개, 제육덮밥, 김밥, 라면, 계절메뉴-콩국수, 냉면, 볶음밥, 한국식 돈가스, 국밥-콩나물국밥, 순대국밥.
나는 국물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일반적인 한식 밥집은 국물 없이는 장사를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쌀밥에는 국물을 떠올리기 때문일까. 메인으로 국물요리나 볶음요리를 둬야 찬을 간단히 구성해 흰쌀밥과 함께 구색을 갖춘 한 끼를 만들 수 있기때문일 것이다. 막 만들어낸, 따뜻하다 못해 내 앞에 올 때까지 절절 끓는 음식에서 모락모락 나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기도 한다. 위에 나열한 메뉴에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메뉴를 찾는다면 비빔밥 정도일까. 일반적으로 5천 원에서 8천 원 사이의 음식을 만드는 데에 사용할 수 있는 고기의 품질은 정해져 있다. 민찌라고 부르는 다짐육. 다짐육은 한 부위를 선택해 갈아 쓰기도 하지만, 저렴한 다짐육의 대부분은 여러 자투리 부위를 섞어 간다. 소고기 민찌, 돼지고기 민찌 주세요~하면 알아서 갈아주시거나 갈아놓은 고기를 주는데, 낮은 등급의 호주산이나 미국산 소, 수입산 돼지고기를 사용하기 마련이다. 또, 고기는 좋아하지만 고기 냄새는 싫기 때문에 질이 낮은 고기가 들어가는 음식들은 대게가 그 냄새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자극적인 향신료들을 많이 쓰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는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아닐까. 두 번째로 물을 부어 빨리 끓여내 만드는 국물의 허전함을 보강해주기 위해서 육분이 들어간 조미료를 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찌개와 국에서 매운 감칠맛이 돈다. 밥집의 음식 색상을 보면 역시, 붉은 악마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대게가 붉다. 그나마 시금치 같은 야채를 간단히 무쳐주는 곳은 초록색이 남아있다. 붉은 음식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붉은 음식의 맵고 짠 것을 매끼 먹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속이 계속 불편하다는 것이다. 매운 음식을 즐기지 않는 내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붉은 악마는 하겠어도, 빨간 음식을 연일 먹기에는 위장이 너무 여리다.
다음, 채식 밥집으로 가면 이렇다. 채식을 권장하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채식주의자라면 자연히 채식 밥집을 찾겠지만, 일반 사람이 채식 밥집을 찾는다는 것은 채식 = 건강이라는 단순한 연결고리를 갖고 찾는다. 식당도 그런 이미지에 부합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냄새가 많이 나는 고기를 사용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음식의 간이 고기 국물에 비해 심심한 편이다. 아주 매운 콩나물국이 나온 적은 있지만, 심심한 게 다가 아니다. 맛이 있어야 식당이 운영되는 것 아닌가. 간은 보통 장류와 소금, 육분이 들어가지 않는 조미료로 맞추고, 놓칠 수 없는 국물 맛은 야채를 듬뿍 넣어 보강한다. 고소한 맛이 있는 들깨도 자주 사용한다. 시장엘 가서 가격을 비교해보면 고기 한 덩이를 살 수 있는 돈으로 조금 과장해서 야채를 산더미로 살 수 있기 때문에, 다듬는 고생이 있어서 그렇지 재료를 쓰는데 아낌이 없다. 맛은 개인적인 판단으로 남겨두고서라도 이런 곳에서 밥 한 끼를 먹고 나오면 속이 편안하다.
아쉬운 점은 이런 밥 집은 드문 드문 있는 곳이라 매일 같이 이용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주로 분식이나 한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고추장을 따로 줄 것을 부탁하며 비빔밥을 시키거나 김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아침은 간단히 바나나나 체인 빵집의 간식빵과 커피로 먹는다. 저녁이 문제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도 먹을 것이 없고, 해 먹으면 또 냉장고를 오염시킬 여지가 있기 때문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같이 먹던가, 대충 또 비빔밥을 시켜 먹는다. 이렇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지나면, 매일 사람을 만나 약속을 하는 것도 그렇고, 상대를 고려해 먹어야 하는 것도 그렇고, 음식이 마음에는 들지만 매일 먹기 부담스러운 가격도 그렇고 여러모로 불편해지는 시점이 분명 온다. 카드 명세서에 주르륵 뜨는 커피, 제과, 식당에서의 압도적인 사용률과 합산액을 계산하며 고등학교 경제 시간에 배운 앵겔 지수라는 것을 어김없이 떠올린다.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이 정도의 엥겔 지수면 이 사회 계층의 어느 부분에 속하는지, 이 부분을 좀 줄이되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없는지 등을 잡다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다시 냉장고로 돌아간다. 물론, 매 끼니, 아주 훌륭한 식사를 남의 손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자의 삶은 누려본 적 없는 본인의 상황이다. 이런 굴레를 겪어 본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리라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 있으므로, 동지들이 많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독립한 독거 어른이라면 자신의 끼니를 혹은 자신의 냉장고를 잘 꾸려야만 한다. 적어도 하루 한 끼나 일주일에 도합 다섯 끼 정도는 말이다. 하루 세 끼를 다 챙겨 먹는 건 바쁜 현대인에게 무리이니, 두 끼로 생각하고 계산해도 주 7일 14끼나 된다. 이 중 내가 챙겨야 할 끼니를 일주일에 최소 다섯 끼로 계산한 것은 힘들고 지칠 때 우리를 구원해주는 배달 음식(치킨이나 탕수육, 피자, 족발)에게 한 번 내어 주었고, 사교와 미식을 위한 저녁 두, 세끼(파스타, 스테이크, 치맥 등), 간단한 과일과 빵, 주먹밥에게 내어줄 수 있는 다섯 끼(주로 점심에 해당), 분식집 밥 두 끼 정도를 제하고 계산한 결과이다. 현실적이지 않은가! 챙기는 끼니 수는 각자 조절하면 된다. 일주일에 다섯 끼 챙기는데, 냉장고는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가급적 잘 안 썩고 쉽게 시들지 않는 것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간단하게 만들어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으로 다시 냉장고를 채울지 고민하기에 앞 서, 세어보니 이렇게나 많은 끼니를 챙기며 살다니, 끼니를 챙기기 위해 돈을 벌고, 돈을 벌기 위해 끼니를 챙기는 것 같아 약간 울적해진다. 끼니란 "산다"는 것과 직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