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를 읽으며 '시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인용하여 초록 글씨로 표기하고, 해당 인용들을 글 속에서 활용하며 사랑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꿈이 생겼어.'라고 너는 말했다. 그것이 어떤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은 말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 말을 듣기 전날 밤 나는 우리가 함께 하는 순간순간에 얼마나 더 충실해야 미련이 남지 않을까, 더 표현하지 못한 마음에 아쉬워하지 않으며 잠자리에 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감정은 충만하나 행동거지는 불충분하고 정서는 나약한 날들이었다. 꿈이 생겼다는 너의 말을 들으며 '나와 함께 하고 싶은 게 있나?' 하는 마음보다 '그 꿈에 내가 없으면 어쩌지'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말을 멋대로 해석하며 자책하고 닥치지 않은 일에 손이 차가워지게 두려워하던 나는 너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을 시작한 사람이 욕망하는 것은 연인의 마음이다. 사랑의 시작점에선 그것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무모하게 행동한다. 만약 그렇게 얻은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다른 것들도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면 ㅡ예를 들면 함께 몸 누일 쾌적한 공간이나, 그 공간을 빌릴 돈, 지친 하루 끝에 서로에게 달려갈 체력, 양쪽 집안의 우환 없음, 편의점에 마침 딱 하나 남은 바나나 우유를 살 수 있는 타이밍, 깊은 상처에 헤어질 고민을 하고 있는 날 우연히 길에서 흘러나오는 우리의 테마곡 등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더라면ㅡ 몇 명이나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그 아득한 횟수의 우연과 타이밍이 맞아야만 가능한 일을.
지금은 안다. 우리의 우정은 안일했다. 우정에서 시작된 관계가 사랑으로 넘어가는 예는 꽤 빈번하다. 아니, 아주 빈번하다. 그렇기에 '친구와 연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흔하고 흔하게 벌어지는 일에 아직도 찬반토론이 열띤 거겠지. 자신들이 그 질문을 앓고 있으니까. 감정은 시작됐으나 상황이 너무 복잡하니까.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연인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던 내 말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깊이 상처 받은 너를 보며 이전과 다른 감정이 시작됐다. '네가 너무 소중해서 영원히 친구로 남고 싶어'라는 말이 '사랑해'와 얼마나 가까운 말인지 그땐 몰랐다.
네가 보여주는 사랑이 거대해서 나는 사랑받는 것보다 하는 게 더 좋았다. 사랑하는 게 후련했다. 일방적일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 내 마음을 진부하고 감정적인 방식으로 아무리 넘치게 표현해도 너의 마음 크기에 미치지 못한다니. 영원히 거대할 것처럼 보이는 너의 사랑 속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문장을 수집하고 그 문장의 힘으로 하루하루 닥치는 일들을 견뎌내던 나는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너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너의 말들을 먹고살았다. 그 말에 물을 주고 햇빛을 주고, 어느 날은 너무 커지길래 무서웠고 멀찌감치 방치해두었지만 며칠 가지 못해 다시 껴안고 밀린 물을 흠뻑 주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며 너의 그 예쁜 말들이 드디어 나를 이루게 되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사랑이 시작되면 그걸 가질 수 없다는 걸 모르게 된다. 네가 심사숙고하여 던진 말들을 심사숙고하여 해석하였으나 말이란 것은 그걸 뱉은 사람조차 시간이 흐르게 되면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다. 의지가 변화를 막을 수 있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누군가 사랑에 빠졌을 때 공허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뻔뻔한 거짓말이다. '연애는 왜 시작과 끝을 자기 내부에 보유하고 있는 독자적이고 완결된 형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던 무수한 다짐에도 불구하고, 연애의 본질은 불안이었다. 연애의 끝은 연애가 될 수 없고, 상상력을 아무리 펼쳐도 연애의 끝은 결혼 아니면 이별이었다. 행복한 나날 속에서도 '다음 단계를 그저 유보하고 있기에 지금 우리 관계가 지속되는 게 아닌가' 궁금했다. 그 무렵 내 일기장에 가장 자주 등장한 단어는 '공허'와 '행복'이었다.
다른 존재가 우리의 내부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존재를 따라 살지 않을 수 없다. 너처럼 나의 자아에 깊숙이 들어온 사람도, 홀로서기 잘하고 있는 나에게 함께 하는 행복 속에서 살자고 유혹한 사람은 없었다. 정확히는, 너는 그런 유혹을 한 적이 없다. 혼자 그려보는 미래 속에서 나는 유혹한 사람 없이 유혹당했고, 나를 버리고 너를 택하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꼈다. 어느 여행지에서 밤에 산책을 하다가 텅 빈 광장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 광장에서 미친 척 뱅글뱅글 춤을 추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신나게 혼자 놀다가도 네가 오면 추던 춤을 멈추고 나는 이 광장을 내어주겠지.' 함께 춤을 춘다거나 내가 추는 춤을 보며 네가 주변에서 박수를 칠 수도 있다는 것은 나중에 한 생각이었다. 그 광장에 멍하니 서서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하는 중에 나를 버리지 않는 방법을 몰랐고, 그게 가능해질 때까지 너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미션이 생겼다. 내가 너만 바라보는 거울이 되면 너는 사랑하는 대상이 없어질 테니, 매일 밤 너를 덜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바람이 불어올 때 그쪽으로 얼굴을 돌리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꽃이 흔들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한다'라든가, '바에 앉을 때는 서로의 감정이 충돌하지 않기 위해 나란히 앉아야 한다'라든가, '거리를 품고 있는 존재들이 서로 사이를 가질 때 우리는 우주가 된다' 등의 말들을 일기장에 적어두고 주문처럼 외웠다. 사람 사이가 너무 가까우면 오래지 않아 산소가 부족하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숨통을 쥐고 있다. 그 무렵 자주 숨이 가빴다. 어지러웠고 쉽게 지쳤다. 사랑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뻔한 노래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이 실제로 병이었다니.
몸 안에 사랑이 살기 시작한 이상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 경우는 없다. 네가 내 인생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망조 속에서 소멸하고 싶었다. 너무 행복할 때 사람은 죽고 싶어지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쾌락은 연애의 과정에서 탄생한다. 그 연애가 시작될 때 까지는 상상도 추측도 할 수 없는 쾌락이다. 널 만나는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인생의 절정일 수도 있겠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죽고 싶어 질 줄은 몰랐다.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의 제목이 그토록 야릿한 이유는 쾌락의 순간에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죽음을 떠올리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마지막이 최고이길 바라는 건 들뜬 망상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에 각인된 것이던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때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무모하고 근시안적인 만큼 쾌락적이고 황홀했다. 그렇게 사랑의 시작에서 벌어진 것들은 종종 끝을 향한다. 삶의 끝, 기쁨의 끝, 슬픔의 끝, 권태의 끝, 아픔의 끝, 혹은 사랑 그 자체의 끝까지. 그런데 우스운 건, 끝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다시 시작점에 놓여졌다. 사랑의 시작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끝을 상상한 만큼, 끝에 다녀온 만큼 사랑은 시작되고 그 무수한 시작점이 '관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점점이 모여 선이 된다는 것을 체화했다. 네 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