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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락 Jun 27. 2022

파괴가 좋다던 친구


거센 비가 오거나 아주 강한 바람이 부는 날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막 자라난 여린 꽃대가 무참히 꺾여있는 모습,

찢겨진 현수막, 바람에 붕 떴다가 깨진 플라스틱 욕조 조각을 발견하면 쫓아가서 구경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세찬 바람에 모두 떨어지면

폭신해진 벚꽃색 바닥을 찍는 게 아니라 고개를 들어 꽃대만 남은 잔해를 찍던 친구.


그 친구의 인스타에는 그렇게 찍은 사진들 밑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파!괴!파!괴!’ 라는 글이 달리곤 했다.


남은 잔해가 처량하고 불쌍하지 않냐고, 슬프거나 상실감이 들지 않느냐고 묻는 나에게

‘파괴된 모습만큼 아름다운 걸 보기 힘들어. 파괴는 무언가 잃어버리거나 상실한 잔해가 아니라

가득 찼던 무언가가 다 터져 나오는 충만한 에너지야’라고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벌써 10년도 넘게 연락을 하지 않고 있는

막역하지는 않았던 이 친구가 떠오른 것은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부술 듯이 내리는 장맛비를 보며

저 비에 내 몸이 밤새 두들겨 맞은 것인가

곡소리가 절로 나는 목과 어깨를 주물거릴 때

‘파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내 몸을 돌보지 않고 파괴만 하고 있다는 자책이었는지

저 비가 이 세상을 다 파괴해버렸으면 좋겠다는 환멸이었는지

파괴를 통해서만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절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그 친구에게 안부 인사를 건넨다.

‘안녕. 파괴적인 목소리와 파괴적인 사람들, 파괴적인 세상 속에서 여전히 파괴를 좋아하니.

나 역시도 파괴되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어. 견고해 보이는 것들이 전복될 때 네 생각이 날 것 같아.

고마워. 너로 인해 조금 더 과감하게 꿈꿀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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